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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줌마 Oct 09. 2020

아빠는 될 놈은 알아보셨다.

어찌 보니 “아들과 딸‘ 냄새가 조금 난다.

남동생이 여섯 살 때, 밖에서 놀다가도 때가 되면 잘 알아서 집에 오던 동생이 들어오지 않았다.

가끔 해가 빠지도록 노는 것에 정신이 팔려 늦게 들어올 때도 있었지만 그 날은 너무 늦어 어둑어둑해졌다. 엄마와 우리는 동생을 찾아 온 동네를 헤매며 다녔고 둘째는 어느새 울먹이고 있었다.   

 

저 멀리 벽돌공장에 쌓아둔 모래더미가 보였다.

그 앞에 놓인 동생의 신발 한 짝. 엄마와 나는 초주검이 되어 동생의 이름을 다급하게 부르며 달려갔다. 혹시나 모래더미 속에 깔려 있나 싶어 가슴을 졸이며 다가가는데

“엄마!”

해맑게 웃으며 모래더미 뒤에서 동생이 나타났다. 얼굴이며 옷에 모래가 잔뜩 묻힌 채로 신발 한 짝을 신고 있었다. 노느라고 신발이 벗겨진지도 몰랐고 시간이 그렇게 흘렀는지도 모른 채 신나고 놀았던 것이다. 엄마는 엉덩이를 한 차례 때리며 놀란 가슴을 쓸어안았고 우리는 눈물을 그쳤다.


그 동생이 어떤 동생인가?  동생이 태어날 때 우리는 어려서 모르지만, 아들인지 미리 알았었는지 엄마가 유일하게 산부인과 병원에서 낳은 자식이다. 아빠와 엄마가 남동생을 안고 집으로 들어오던 때의 환한 얼굴이 아직도 기억난다. 어린 마음에도 좋은 일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얼핏 보면 한때 화제였던 드라마 ‘아들과 딸’ 스토리일 것 같지만 산부인과 병원에서의 출산 그것이 남동생이 받은 최상의 대접이었다. 아들과 딸을 차별하여 아들만 공부시키던 그 당시 어른들과 다르게 우리 엄마 아빠는 자식 넷을 같은 마음으로 기르셨다. 이 부분에서 동생들과 엄마의 생각은 다르다. 맏딸인 내가 최상의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좋은 옷에 맛있는 것은 거의 내 차지였고 남동생과 여동생들은 그러려니 하고 살았다.   

 

동생은 IQ도 매우 높아 칠판에 쓰인 것은 사진처럼 외워진다고 했다.

신기한 일이다. 그러니 1등을 놓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나처럼 아빠에게 ABC를 배우지도 않았고 과외금지 시대에 살았기 때문에 학원 근처에도 가지않았지만 그 어려운 수학의 정석을 척척 풀었다. 집중력 또한 대단하여 중학생때에도 학교에 가서 밤을 새며 공부를 하곤 했다. 여섯 살 때처럼 노는 것도 좋아하여 딸인 우리들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 엄마 몰래 롤러장도 다니고 가끔 딴짓도 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 사실을 다 커서야 알았다. 가끔씩 아무도 모르게 일탈을 즐기는 두 얼굴의 모범생이었다니 주도면밀하다. 게다가 우리가 공부에 들이는 노력에 비해 조금만 노력하여도 그 결과는 창대하였으니 아빠가 아들을 의사로 키우려고 마음먹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 때부터 동생은 아빠 인생의 확고한 한방이 되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동생의 학력고사 점수가 그렇게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평소 모의고사에서도 늘 고득점이었고 학력고사를 치고 나올 때에도 기분 좋은 확신에 찬 얼굴이었다. 우리 가족은 물론 동생의 학교에서도 난리가 났다. 시골 학교에서 최초의 의대생이 나올 것이라 기대했을 정도로 동생은 학교의 자랑이었다.  

   

남동생이 울었다.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우리로서는 얼마나 답답하고 기가 막힌 지 가늠할 수 있었다. 자신의 답안지를 확인하고 싶어 학력고사를 주관하던 중앙교육평가원에 편지를 쓰고 싶다고 했다. 아마 칸을 밀려 썼던 모양이다. 흔히들 둘러대는 변명은 아니었다.   

 

아빠는 그런 아들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신문만 읽었다. 

   

의대를 갈 수는 없지만 다른 친구들에 비해 훌륭한 점수였다.

동생은 국립대 전자공학과에 등록만 하고 재수를 하기로 했다. 재수학원을 간 첫날, 자존심이 강한 동생은 학원을 그만뒀다. 재수생 무리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 싫었다. 학교를 다니며 다시 공부를 하여 의대를 가겠다고 하였다.   

 

대학생활의 맛을 본 동생은 공부는 뒷전인 것 같아 보였다. 말로는 공부를 한다고 했지만 우리 기준으로 보아 그렇게 갈 의대라면 나도 가겠다 싶었다. 다시 학력고사를 치르는 날, 시험이 끝나는 시간에 수험생 무리에서 동생을 어떻게 찾지 하는 순간, 젤 먼저  나오는 낯익은 얼굴, 동생이었다. 동생은 그해 의대에 합격하였다.  우리의 기대가 부담스러워 가볍게 여기는 척하며 열심히 공부했나 보다. 역시 주도면밀한 놈이다.  


동생의 합격소식을 확인한 날, 둘째와 나는 시골 신작로에서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고 좋아했었다.

엄마 아빠의 얼굴이 산부인과 병원에서 남동생을 안고 돌아올 때의 얼굴처럼 환했었다. 아빠는 한동안 웃음을 지었다.   

 

동생은 어려운 의대 공부를 마치고 개업의사가 되어 잘 살고 있다.

모두들 병원경영이 어렵다고들 하는데 동생은 실력도 좋고 인성도 좋아 꽤 잘 나가는 의사이다.  말그대로 슬기로운 의사이다. 아빠를 닮아 아주 자상한 아빠, 자상한 남편이다. 올케도 인정하는 좋은 남자이다.


풍족할 만큼 돈이 있어도 여전히 자신에게는 알뜰함을 넘은 짠돌이지만 우리 세 자매와 엄마를 해외여행도 보내주고 맛있는 과일도 택배로 자주 보내준다. 가끔 금일봉도 기분좋게 쾌척하여 세 자매의 백화점 나들이를 도우며 집안의 대소사에 돈 드는 일은 도맡아 한다.


엄마에게는 매일 전화하는 아들이다. 딸들도 쉽지 않은 일이다. 장을 봐주고 틈틈이 들여다보며 엄마와 함께 맛있는 것을 먹고 놀아준다. 엄마 손을 꼭 잡고 다니며 엄마의 사진도 예쁘게 찍어주는 모습은 감동이다. 엄마가 아프거나 엄마에게 돈이 드는 일도 도맡아 한다. 아들이 결혼하면 내 아들이 아니라던데 동생은 아직도 엄마의 아들이다. 내 친구들은 돈이 있다고 다 그렇게 못한다며 남동생의 인성을, 그런 동생을 둔 나를 부러워한다.

   

지금 생각하니 아빠의 계획은 다 이유가 있었다.    


딸 셋은 교사가 되어 안정된 직업을 가져 남편에게 의지하지 않고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살기를 바라셨다.

아들은 의사가 되어 본인의 성공은 물론 홀로 남겨질 아내와 세 딸을 경제적인 면에서 조금 더 자유롭게 해 주기를 바라셨다. 거기에 아들의 착한 인성은 기본이 되었다.    


아빠는 될 놈은 알아보셨다. 


그래서 동생이 롤러장을 가도, 대학의 맛을 보느라 공부를 소홀히 해도 기다려주셨다. 신문을 보고 웃기만 하신 것 같았지만 아빠는 아들의 속내를 알고 아들을 믿으셨다.

그 아들이 의사가 되어 우리 가족 모두 두루두루 잘 살피리라 믿으셨다.


그렇게 아빠의 한방은 성공했다.  부모님의 고단한 인생을 값지게 해준 KO펀치였다.

그리고 그 아들은 아빠의 믿음대로 잘 살아가고 있다.

맏딸인 나로서는 미안하고 고맙고 또 고맙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 아빠의 눈에 될 놈은 아들이었지 딸이 아니었다.

딸은 선생, 아들은 의사, 결국 최상의 대접은 아들이었다. 어찌 보니 드라마 ‘아들과 딸’의 냄새가 조금 난다.

‘나도 의사가 되라고 했으면 죽으라고 공부했을 텐데’ 가보지 않은 길이니 큰 소리를 쳐본다.

이 나이가 되어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나를 아빠는 진즉에 알아보셨다.


역시 우리 아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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