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2003년에 개봉된 영화 바로 <클래식>이다. 클래식에서 다수 등장하는 장면이 바로 소나기이다. 주희와 준하의 사랑이 시작된 날도 소나기가 내린다. 주희의 딸인 지혜와 상민도 소나기가 내리는 날 둘의 인연이 시작되기도 한다. 소나기는 자신도 모르게 사랑에 빠지는 걸 의미하는 걸까? 사랑은 배우거나 노력해서 하는 게 아니라 마치 교통사고를 당한 것처럼 갑작스럽게 시작되기도 한다. 본 영화에서 주희와 준하의 사랑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순식간에 끝나게 된다. 누군가의 첫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감성을 자극하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이 영화가 개봉될 때쯤 난 남편과 이제 연애를 막 시작한 연애 초기였다. 둘이 영화관에서 두 손 꼭 잡고 영화를 관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영화 장면 장면마다 설렘으로 연애 세포가 살아났던 기억이 있다.
손예진(지혜)과 조인성(상민)이 소나기 내리는날 같이 재킷을 우산 삼아 대학 교정을 뛰어가는 장면은 어디에도 견줄 수 없는 가슴 뛰게 하는 장면이다. 이때 나오는 ost 자전거 탄 풍경의 ' 너에게 난 나에게 넌'은 대중음악으로 급상승했다. 그리고 우리 부부에게도 추억이 듬뿍 깃든 노래이기도 하다.
주희와 준하가 시골에서 처음 조우하던 장면, 귀신 보러 갔다가 배가 떠내려가 소나기를 맞으며 뛰어오는 장면, 주희가 다리를 다쳐 준하가 업어주는 장면 소나기를 피하며 수박 서리해서 수박을 나눠먹는 장면, 하지만 서로를 너무 좋아하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사랑할 수 없는 장면, 준하가 기차 타고 월남 가며 주희의 목걸이를 건네받던 장면 카페에서 마지막 만남을 갖던 날(준하가 눈이 안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주희가 가슴 아프게 울던 장면)은 가슴이 아파 공감하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우리의 사랑도 순수했다
나는 이제 20살 새내기 대학생, 남편은 19살, 고3 이 시기에 우린 처음 얼굴을 대면했다. 그렇게 청년회에서 청년모임 때 만 보던 사이였는데 남편이 나를 좋아하는 신호를 조금씩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너무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래서 피해 다니며 외면했다. 더군다나 나보다 어린 나이... 상상할 수도 없었다. 이 시기 나는 다른 사람을 가슴 깊이 짝사랑하고 있었기에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고2 여름, 영어성경학교 다니며 만난 동갑내기 남학생을 흠모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라는 같은 꿈을 꾸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가 동일해서 그 아이와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관심사가 비슷했던 우리는 많은 것들이 잘 통했다. 부드러운 말투, 키도 크고 멀끔하게 생긴 그 남자 친구의 외모도 한몫했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자라난 그를 향한 설렘의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렸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나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내심 그에게 내 마음을 내비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대학생이 되었다. 대학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가 잊히지가 않았다. 그래서 난 2년 이상의 짝사랑 연예의 종지부를 찍고자 용기 내어 그 아이 동네까지 찾아갔다. 늦은 저녁 숨을 몰아쉬고 쿵쾅쿵쾅 거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라 집 전화로 전화를 했다. 그 남자 친구 엄마가 전화를 받으셨다. " 안녕하세요. 혁준이 있어요? , 혁준이 친구인데 잠깐 바꿔주세요" 전화를 받은 그 친구와 안부를 묻고 대학 얘기를 시작으로 통화를 나눈 후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실은 고 2 때부터 나 너 좋아했어. 잠깐 나올 수 있니? 너의 집 앞이야."
"왜 그때 얘기 안 했어? 진작 얘기하지? 나 지금 여자 친구 있는데.... 너무 미안하다"
공중전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대답에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용기 내 고백한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 잘 지내라는 마지막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눈물이 났다. 꼭꼭 숨겨왔던 그 친구에 대한 마음이 이렇게 허망하게 끝이 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집에 와서 이불 뒤집어쓰고 세상이 끝난 것처럼 펑펑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첫사랑은 아쉽게도 짝사랑으로 막을 내렸다.
계속되는 무관심 속에서도 남편은 성년의 날 꽃을 선물하고, 생일날 선물을 챙겨주고, 삐삐에 메시지를 남기고, 교회 수련회 가서도 옆 오빠나 친구가 짓궂게 대하면 막아주는 등 보디가드 역할을 해 주었다. 그 호의가 무척이나 고마웠지만 내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에 대한 호감을 거두지 않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나를 생각하며 쓴 다이어리와 직접 세공해서 만든 반지라며 수줍게 건네는 것이 아닌가.....
1년 넘게 쓴 다이어리 속에는 나를 향한 진심이 묻어나는 글들로 가득했다. 얼마나 나를 생각하는지, 좋아했는지, 자작 시부터 나를 향한 마음의 글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버스에 앉아 나를 생각하며 쓴 글, 아르바이트하다 끄적인 글, 밤에 라디오를 들으며 적은 글 등등.. 순간 찰나의 생각들이 그 다이어리 지면을 채우고 있었다. 순간 감동의 물결이 일렁였다. 그냥 좋아하는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구나를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건넸던 많은 편지들
남편도 나를 열렬히 오랫동안 짝사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짝사랑의 아픔을 가슴 아프게 경험했던 터라 나를 향한 남편의 마음을 더 이상 외면할 수가 없었다. 그 이후 많은 고민 끝에 조심스레 마음의 문을 열고 우리의 연애는 시작되었다.
배려심과 자상함이 가득한 남편은 특히 비 오는 날 더 돋보였다. 내가 비에 옷 젖을까 우산의 2/3를 내게 기울어져 주었고 어깨를 손으로 꼭 감싸주며 젖을세라 자신의 팔과 손으로 막아주었다. 남편의 군 생활 동안 수많은 손 편지를 써주었다. 이런 자상함과 든든함 속에 우리는 7년이라는 긴 연애의 종지부를 찍고 연애를 시작했던 3월 그 달에 결혼식을 했다. 7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남편에게 많은 상처도 주고 못난 모습을 보였는데도 남편은 우직한 고목나무처럼 다 받아주었다.
벌써 결혼 14년 차가 지나가고 있다. 지금도 남편은 내가 삐져있거나 우울해 보인다고 생각되면 통기타로 우리의 추억이 깃든 노래 "너에게 난 나에게 넌 '을 연주하며 노래로 내 마음을 풀어준다. 그 세심함이 참 고맙다.
남편의 통기타와 악보책을 보니 더 그리워지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점에 비가 내리니 클래식 영화의 장면과 연애했던 장면들이 오버랩되면서 마음이 따뜻하게 온기로 채워지는 듯하다. 소나기처럼 끝나버린 가슴 아픈 짝사랑이 된 첫사랑, 한지에 물이 스며들듯 찾아온 진짜 사랑 이렇게 두 사랑이 공존하며 나의 20대의 사랑은 그렇게 채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