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나를 호명하시며 내 그림일기를 전교생 앞에서 읽어보라고 하셨다. 9살, 그 어린 나이, 친구들과 언니 오빠들 앞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그림일기를 낭독했다.
그 일기 내용이 아직도 또렷하고 생생하며 선명하다. 일기 내용인즉슨 시골 큰집 앞마당에서 동네 어른들이 모여서 김장하던 풍경이었다. 시골이라 넓은 흙마당에 덕석(매트)에 배추와 무를 큰 산처럼 쌓아놓았다. 넓은 갈색 다라에 갖은양념(무, 마늘, 갓, 고춧가루....)을 버무려 어른들이 삼삼오오 모여 김장하던 모습을 세세하게 그려냈다. 그리고 김장이 끝나고 가마솥에 수육을 삶아 김치에 싸 먹는 모습과 맛을 그림일기에 아주 자세히 묘사했었다.
일기 낭독을 마치자.
"잘 들었지? 일기는 이렇게 선아처럼 쓰는 거야!"
라고 담임선생님의 칭찬의 말씀과 언니 오빠들의 박수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었다. 그 일기를 계기로 그림일기 최우수상을 받았다. 어린 마음에도 무척 행복해서 엄마 아버지께 한달음에 달려가 자랑했던 기억이 있다. 부모님은 기뻐하시며 액자에 끼워 시골집 방에 걸어놔 주셨다.
그 상에 힘입어 이후로도 열심히 그림일기와 고학년이 되어서도 일기를 썼다. 어렸을 적 그림을 잘 그리고 글씨를 또박또박 쓰기로 칭찬을 많이 받았더랬다. 더불어 경필 대회 상도 받았다. 선생님 칭찬이 참 좋았다. 일기 말미에 "참 잘했어요"가 글자가 선명히 박힌 도장과 선생님의 다정 어린 첨삭 몇 줄의 흔적이 왜 그렇게 뿌듯하게 느껴지던지....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느 날 딸아이 일기장을 보았다. 또박또박 써 내려간 글씨체에서 힘이 느껴졌다.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써 내려간 일기 장안에 딸이 그날에 느낀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가만히 읽고 있노라니 나의 어린 시절 감정들이 교차하면서 무척이나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하루의 기쁨, 아쉬움, 힘듦 , 부러움... 나의 어릴 적 일기장과 딸아이의 일기가 오버랩되며 나의 추억이 급물살 타듯 힘차게 되살아났다.
중고등학교 사춘기 시절엔 내 감정을 혹여나 들킬까 봐 작은 열쇠가 달린 일기장에 나의 감정과 흔적을 담았다. 한때는 영어에 심취해서 한동안 영어로 일기를 썼다. 또 한때는 순정만화작가라도 된마냥 예쁘게 만화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
2000년대 영화 동감포스터도 한켠에 자리잡고 있다.
20살 초엔 남편과 데이트를 하며 파아란 스프링노트에 감성의 시, 나뭇잎 말린 것, 네 잎 클로버, 남편과 연애시절 본 영화 포스터, 그때의 감정, 책의 좋은 문구들을 오려서 붙이고 아기자기하게 꾸미며 일기장 지면을 채워 나갔다. 그 20살 때의 감정과 마주하고 있노라니 눈처럼 순수했던 감정이 되살아나면서 꽃다운 나이로 회귀되는 듯하다.
어느 날 남편이 책장을 정리하다 나의 일기를 발견했다."자기, 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아주 컸구나 허허."
"뭐야, 당장 이리 내놔, 누가 보래?"
나는 부끄러워 순간 일기장을 낚아채버렸다. 남편은 아주 흐뭇하다는 표정으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어느 날은 딸아이가 나의 일기장을 읽어보더니
"음~~ 아빠와 아주 예쁜 사랑을 하셨군요"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말에 어찌나 부끄럽던지
"딸, 아빠 같은 자상한 사람이랑 나중에 연애해!" 그랬더니
"네?? 그건 아니고요" 하며 냅다 도망가는 것이 아닌가 ^^
나의 20대에 담긴 남편과의 연애 추억을 딸아이와 대화를 하는 가운데 유대감이 형성되곤 한다.이후로 아이들은 엄마 아빠의 라떼 연애 얘기 듣는 것을 흥미진진해한다. 좀 더 리얼한 표정과 몸짓으로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니 더 몰입해서 듣는 경향이 있다.
지금은 다이어리와 블로그, 브런치에 삶의 발자취와 흔적을 남기고 있다. 작년 20년 6월 22일에 블로그를 시작으로 현재 정확히 1년이 되었다.
블로그에 카테고리가 하나씩 늘어갔다. 에세이, 독서일기, 추억여행일기, 직장 이야기, 마음 충전하는 일상, 생각, 감사일기 등을 소소하게 기록하고 있다. 블로그에 기록하지 못하면 앱노트에 간략하게 적는다.
나의 기록이 곧 삶의 메시지다
나의 기록이 곧 삶의 메시지다라는 간디의 명언처럼 무미건조하게 흘려버렸던 시간들에 의미가 부여되고 있다. 아이들의 소소한 일상을 기록하니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말이 들리고 세심한 행동이 보이고 작은 표정과 감정에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블로그에 남긴 추억을 공유하니 공감대 화가 풍성해진다.
그리고 직장에서 인간관계로 오는 어려움을 책을 통해 지혜를 얻고 그 감정을 반영하여 독서기록으로 남기니 부정적 감정 해소는 물론 격려까지 얻어 큰 위안으로 다가온다. 많은 일들이 감사하지만 블로그, 브런치 기록을 통해 소중한 인연들과 연이 닿은 것이다. 이웃, 작가님들과 소통하고 공감하면서 또 하나의 세상을 얻은 기분이 든다.
일상이 기록으로 이어지다 보니 삶의 찰나를 기록하기 위해 관찰력이 자라났다. 맑은 아침 신선한 공기, 내 뺨을 스치는 바람, 길가의 작은 들꽃 , 곤충 등 작은 생명체에도 사랑의 눈길을 주게 된다. 계절의 변화는 물론이고 자연의 섭리에 더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일상에 생명을 불어넣으니 스치는 인연과 일상에도 의미가 새겨진다. 길가에 앉아 계시는 어머님들 보며 친정어머니가 떠오르고, 하교하는 아이들이 모두 내 아이들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하루하루의 기록이 내 삶의 메시지가 되고 역사가 되고 추억, 영혼이 깃들게 되는 듯하다. 일기는 솔직한 나와 대면하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나의 내면을 북돋우고 보살핌으로 우리는 안으로 뿌리내리듯 성장할 것이다. 나의 발자취이자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다이어리와 블로그, 브런치 일기장이 앞으로 어떤 이야기로 채워질지 기대가 되고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