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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이치영 Oct 16. 2021

어느 날 가을이 싫어졌다

2021년, 일상에 대한 단상

 나는 날씨가 좋은 어느 가을날 태어났다. 속설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계절을 좋아한다고 한다.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현관문을 열고 나서면 선선한 공기가 코에 스치는 가을을 좋아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을 좋아했다. 늘 가을이 오면 산책하는 시간이 늘어났고 겨울이 되면 일부러 통창 카페를 찾아 핫초코를 마시며 밖을 내다보곤 했다. 

 2016년 어느 가을날, 올림픽공원으로 출근을 하고 있었다. 노오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보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 순간, 가을이 싫어졌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노란 단풍과 코 끝을 스치는 선선한 공기조차 다 싫을 만큼. 그냥 무거운 발걸음으로 일터로 향하는 나 자신이 싫어서였을까? 아니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즐기지 못하고 있음에 화가 난 것이었을까? 

 공연 쪽 일을 시작하고 나서 가을은 늘 바빴다. 연말 특수가 있는 직업 특성 때문이었다. 가을은 잠을 못 자고 바빠질 시즌에 대한 마음가짐이 필요한 시기가 됐다. 평소 먹지 않는 홍삼과 비타민을 가방 속에 챙겨 넣어야 하는 시기가 됐다. 그래도 새로운 콘텐츠를 좋은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낸다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러나 2016년 봄부터 시작한 새로운 공연을 만드는 시간을 보내면서 과연 누구를 위한 공연을 만드는 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누구 하나 행복한 사람이 없어 보였다. 만드는 사람이 행복하지 않은 공연은 좋은 공연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너무 힘들고 내가 생각한 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내 몸과 마음에 지쳤다. 늘 대화를 주도하며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포지션인데 어느 날부터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게 힘들었다. 

 이 모든 것이 어느 가을날, 올림픽공원의 단풍나무를 보며 결국 터져버린 것이다. 결과물을 세상에 내놔야 하는 이 순간, 많은 것을 준비하며 버텨내야 할 이 계절이 싫어졌다. 어쩌면 가을이 아니라 그 모든 걸 견뎌낼 수 없는 나 자신이 싫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찬바람을 맞으며 조금씩 노란색으로 변해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은행나무잎이 대단해 보였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바깥의 변화를, 내면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 

 이날 이후 나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가장 중요한 건 나 혼자 아등바등하며 마음 졸이는 시간을 줄였다. 나만 조급하다고 지금까지 안된 일이 갑자기 되진 않는다. 단풍도 어느 날 갑자기 색을 바꾸진 않는다. 서서히 조금씩 물들어간다.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여유도 필요하다. 변화를 받아들일 마음도. 그러자 조금씩 여유가 생겼다. 나이가 들어간 것일지도...

 갑자기 추워진 오늘, 문득 2016년 어느 가을날이 생각난다. 코로나지만 여전히 다른 계절에 비해 바빠지기 시작하는 요즘. 가을을 싫어하지 말고 잘 준비해서 다시 즐겨봐야겠다. 

 안녕, 가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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