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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ealist Mar 06. 2021

<병명은가족>어느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걸까?

류희주 지음, 생각정원 2021

내가 우울증 진단을 처음 받은 것은 2007년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매사에 의욕이 없었고, 좀체 침대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질 않았다. 우는 일이 반복되었고, 생각이란 것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누구와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상태가 이러다 보니 하는 일은 엉망이었고, 나의 이런 상태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엄마였다. 엄마는 부랴부랴 부산에서 분당까지 오셨다. 우리는 거실에서 뒹굴거리며 같이 울었다. 그리고 엄마가 부산에 가신 후 정신과라는 곳에 처음 갔다. 병명은 '우울증으로 추정'이었다. 2주 치 약을 받아왔다. 처음 약을 먹고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다. 사실 지금은 기억나는 게 없다. 그때는 그냥 그렇게 한 번의 진료와 며칠분의 약으로 우울증으로 추정되는 것을 날려버렸다.


내가 다시 정신과에 가게 된 것은 놈과 헤어지고 2011년부터였다. 의사는 상태가 무척 심각하다고 했다. 나는 매일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고, 아침에 일어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당시 나에게는 놈과 헤어진 후 일적인 성장도 있었고, 성과도 제법 좋아서 인정받던 시기였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마음이란 놈은 헤지고 헤져서 바늘로 기울 상태가 아니었다. 약을 먹음에도 불구하고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심각하게 살이 빠지고 결국에는 이걸로 인해 하던 일까지 그만두었다.


여행을 떠났다. 서울에서 먼 곳으로, 영국에 있을 때 가보고 싶었던 에든버러로 갔다. 2주 일정으로 비행기 티켓과 숙박만 정하고 캐리어 안에는 8권의 책을 넣었다. 아는 사람이 없으니 딱히 말할 일도 없고 비를 맞으며 걷고 배고프면 먹고 카페에 들어가 카푸치노를 마시며 책을 읽고 오지랖 넓은 노인들을 만나면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2주를 보내고 분당 집으로 왔지만 그대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썸 타던 남자에게 연락이 왔다.

그래서 그가 사는 캐나다 토론토를 열흘 일정으로 떠났다. 여기서도 다를 게 없었다. 그가 일을 하러 가고 나면 나도 나와서 종일 걷고 배고프면 먹고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장을 봐서 음식을 하고 퇴근하고 돌아온 그와 저녁을 먹고 함께 맥주를 마시며 TV를 봤다. 내가 떠나던 날, 그는 나를 붙잡았다. 여기서 같이 살지 않겠냐고. 나는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집착이 시작되었다. 토론토에 있는 동안 지원서를 넣은 곳에서 연락이 와서 취업을 했는데 그는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해서 내가 어디에서 뭘 하는지 확인했다. 빨리 결혼하고 싶다는 말도 했다. 결혼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불안했다. 잠시 주춤하던 나의 상태는 다시 심각해졌다.

그와 연락을 끊고 나는 홍대로 이사했다.


어느 날 밤, 4주 치 약을 한 번에 먹었다. 누군가 나의 가슴께를 아프게 치면서 전화기 비번을 물었다.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함께 살고 있던 메이트가 보호자 역할을 했다. 메이트가 5분만 늦게 발견했어도 나는 죽었을 거라고 의사가 무섭게 얘기했다. 그리고 나는 2주간 입원했다. 입원 기간 동안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다. 책을 읽고 잠을 자길 반복했다. 살도 많이 빠졌다.


퇴원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주위에 점점 무심해졌다. 누가 뭐라 하든, 뭘 하든 나와 관계된 일이 아니면 일절 관심을 끊었다. 그리고 다시 4주 치 약을 털어 먹었다. 살고 싶지 않았다. 삶이란 무엇인가. 나는 왜 사는가.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인가. 삶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


119에 실려 응급실에 간 지 이틀 만에 깨어났다. 기억에 손상이 조금 있을 거라고 한다. 간의 상태도 좋지 않다고 했다. 이번에는 부모님이 오셨다. 나는 또 입원했다. 엄마는 나를 잡고 미안하다고 펑펑 울었다. 나는 엄마가 왜 우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빠도 우셨다. 두 분이 왜 우는지 당시에는 알 수가 없었다. 2주 후에 퇴원하고 수많은 사람들과 어울렸다.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고 만나고 헤어지는 의미 없는 일을 반복했다.


어느 날 갖고 있던 약을 모두 버렸다. 더 이상 약에 의존해서 살고 싶지 않았다. 제정신으로 미래를 생각하며 인간답게 살고 싶었다. 한동안 잘 지냈다. 새로운 일을 시작했고, 무척 하고 싶었던 일이라 정말 열심히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공황장애가 왔다. 사무실에만 있으면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지하철 타고 가다가 구토가 나올 것 같아서 내린 일도 있었다. 회사 근처 병원에 갔더니 공황장애에 불안장애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다시 약을 먹기 시작했다. 회사를 이직하면서 약을 끊었고, 다시 회사를 이직하면서 약을 먹었다. 지금도 약을 먹는 중이다.


부모님은 나를 이해 못 하신다. 언제까지 약을 먹을 거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부모님을 원망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남들보다 유난히 가부장적인 아빠와 바람난 엄마. 나는 부모님이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우리는 일반 가족이 갖는 유대감 같은 것도 없다. 그건 동생들과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도 그들과의 유대감을 거절한다.


류희주 작가는 정신병의 원인을 가족에서 찾았다. 모든 질병이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원인은 엄마였다. 책을 읽다 보면 어린 시절 아빠나 엄마와의 유대감 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악마 같은 병이라 생각했던 조현병은 나쁜 질병이 아니고, 우울증, 불안장애 같은 질병은 정말로 존재하는지 작가 자신조차도 가끔 의문을 갖는다고 한다. 책을 읽으며 나를 반추해 보았다. 여러 모로 생각할 지점이 많은 글이었다.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우울과 불안이 병으로 포장되었다는 지적도 의미는 있다. 그러나 우울증이 극에 달했을 때 생기는 가장 큰 비극인 자살을 생각하면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우울증 환자의 3분의 2는 자살에 대한 생각을 갖고, 15~20퍼센트는 실제로 자살 기도를 하며, 그중 3퍼센트는 자살로 사망한다고 한다.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은 '살기 싫다'라고 외치게 되는 병, 우울증. 자신이 무가치하게 느껴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력감을 느끼게 되는 우울증. 우울증 환자가 자살을 가장 많이 하는 시기는 퇴원 직후 1주 이내다. 약효가 서서히 발현되어 에너지 레벨이 약간 올라갈 때, 그들은 기운을 낸다. 그것은 살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자주 생각하던 죽음으로 가까이 가기 위해 기운을 내는 것이다. 이처럼 우울증이 호전될 때 에너지가 생겨 자살을 실행하는 것을 '역설적 자살'이라고 한다.

  죽음과 가장 가까이 있는 병, 우울증. 퇴원이 자살의 위험요인이 된다고 생각하면, 우울증이 단지 기운이 없고 게으른 사람이 하는 핑계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케팅으로 우울감이 과대 포장된 탓도 있고 감정이 상업화된 탓도 있지만, 불안과 우울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현실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 지위가 높아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자리에 있다고 피해 가는 감정이 아니다. 어찌 보면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는 점에서 공평하기도 한 감정이다. 앞서 언급한 사람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다는 학교를 졸업했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마흔이 넘어 불안과 우울이 덮쳤다. 마치 '잘난 너희들, 모든 것이 쉬울 것 같지. 다 네 뜻대로 되는 것 아니야'라고 경고라도 하듯이.

  우울과 불안의 터널을 지나다 보면 결국 이런 생각에 다다른다. 내 마음 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데, 무엇이 내 뜻대로 될까. 그래서 우울과 불안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겸허하게도 만든다. 언젠가 한 번은 찾아올지도 모르는 반갑지 않은 손님. 우리의 약한 고리가 터질 때를 노리고 있는 영악한 감정. 당황하여 갑자기 쓰러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면서 미래를 염려하기 시작할 때부터 불안은 우리 안으로 한 발짝 들어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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