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에게 제주에서 어디가 좋았는지를 물어본다면, 난 늘 고민도 없이 영실코스로 오르는 한라산이라고 답한다.
한라산은 제주 어디서나 볼 수 있지만, 늘 볼 수는 없는 산이다. 제주도는 생각보다 구름 낀 날이 많다. 머리 위로 낮은 구름이 깔리면, 한라산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제주도에서 아침 일과는 늘 오늘은 한라산이 보이는지를 살피며 시작된다. 한라산이 선명하게 보인다면, 그날의 날씨는 맑을 것이다.
한라산은 1,950m의 높은 산이고, 산 정상의 날씨는 변덕스럽다. 한라산의 절경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구름 없이 맑은 날이어야 한다. 제주에서 이런 날은 생각보다 며칠 되지 않는다. 우리는 제주에 사는 두 달 동안 가장 좋은 날씨를 골라 한라산을 오르기로 했다.
매일 밤 테이블에 앉아 남편과 날씨를 체크했다. 한 주간의 날씨를 살피며 구름이 없고, 미세먼지가 적은 날을 골라 한라산 영실코스를 올랐다.
영실입구에는 키 큰 소나무 숲이 있다. 감탄을 자아내는 숲이지만, 숲을 지나면 나타날 영실기암을 볼 생각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울창한 숲 조금의 틈 너머로 영실기암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좀 더 오르면 넓게 트인 전망대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잠시 멈추어 서서 숲 사이로 보이는 절벽을 감상한다.
영실코스는 끝없는 계단으로 이어진다. 한라산의 능선을 따라 오르기 때문에 등 뒤로 제주도가 훤히 내려다 보인다. 계단을 오르다 지쳐 뒤돌아 서면, 제주도 시내와 바다, 멀리 섬까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가파른 계단이 이어지지만 멋진 풍경 탓에 힘든 줄 모르고 오르게 된다.
한참을 오르다 보면 서서히 사람들이 줄어들면서, 경사도 차츰 완만해진다. 그러다 갑자기 마법처럼, 평지에 펼쳐진 구상나무 숲이 나타난다. 연두색 싱싱한 새잎이 돋은 구상나무 숲에는 줄기가 하얗게 변해버린 죽은 나무들이 함께 서있다. 죽은 나무와 산 나무의 조화는 오묘하다. 운이 좋아 다니는 사람이 없을 때, 이 구상나무 숲을 만난다면, 그 한적함을 즐겨야 한다.
“비밀의 정원을 만난 기분이야.”
“죽어서도 백 년을 사는 나무라더니, 정말 멋지다.”
구상나무 숲이 끝나갈 무렵, 나무 사이로 조금씩 한라산 남벽이 보이기 시작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남벽을 눈으로 좇으며 걸어 나간다. 마침내 넓은 평지가 펼쳐지고, 뒤로 거대한 한라산 남벽이 등장한다.
이 광경은 아마 제주도 식당에 걸려있는 사진으로 많이 보았을 거다. 철쭉과 구상나무 숲 사이로 보이는 한라산 정상의 사진. 익숙한 달력사진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장담할 수 있다. 처음 영실코스에 올라 이 광경을 실제로 목격한 순간. 누구나 처음 보는 광경에 놀라 잠시 움직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보았을 때의 감동은 사진이나 말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높은 산 위에 평지가 펼쳐진 것도, 용암이 흐르는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듯한 남벽도 모두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소나무 숲으로 시작해서, 영실기암과 오백장군 바위가 이어지고, 갑자기 나타난 평지의 구상나무 숲이 이를 새롭게 전환시킨다. 그리고 넓게 펼쳐진 평지 위로 한라산 남벽이 나타나며 완벽한 끝을 맺는다. 한라산 영실코스는 기승전결이 완벽한 등산코스다.
한라산을 함께 오르는 커플들이 많다. 늘 함께 걷던 그들은 하산길이 되면서부터 조금씩 거리가 생기기 시작한다. 조금 덜 지쳐 보이는 남자가 앞서고, 지친 걸음을 옮기는 여자가 뒤따른다. 한참을 앞서가던 남자가 뒤돌아 본다. 여자가 내려올 때를 기다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거리가 벌어지고, 기다리기가 반복된다.
우리가 산을 오를 때면, 남편은 항상 나를 앞세운다. 문득 궁금해져 남편에게 물었다.
“대부분 남자가 앞서고, 여자가 뒤따르네, 당신은 나를 앞세우는 이유가 있어?”
“내가 앞에 있으면 네가 앞을 못 보잖아. 산에서 앞 못 보면 위험할 수도 있어.”
“당신이 뒤에 오면 앞 못 보는 건 마찬가.... 아.”
“네가 작아서 난 뒤에 있어도 다 잘 보이지.”
“흠 뭔가 씁쓸하군.”
‘위험한 건 아닌지 네가 먼저 해보고 알려줘.’ 뭐 이런 심리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듣고 보니 세심한 배려였다. 오늘도 표현하지 않는 남편에게서 달달함을 찾았다. 남편은 자기가 노력하지 않아도 나 스스로 달달함을 느껴 행복해하니 편하다고 한다.
4년을 제주도민으로 살았었다. 제주를 떠나 있던 6년 동안, 우리가 제주를 왜 좋아했는지를 잠시 잊고 살았다. 우리가 아는 제주를 온전히 느끼기에 두 달의 시간은 짧았다. 최소한 사계절은 보내야 했다.
“우리는 은퇴한 백수잖아. 언제든 다시 오면 되지.”
“다음에는 1년 연세를 구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