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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쿠마몬 Oct 09. 2024

08 감자탕집의 비밀 (2)


이름 모를 사람들이 다가와 남자와 허경일을 떼어놓기까지는 불과 몇 분도 걸리지 않았다. 허경일은 손발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잡힌 채 버둥거렸다. 남자는 건너편에서 우는 표정을 지으며 사람들에게 연신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저 교수라는 사람이 갑자기 멀쩡하게 이야기하다말고 나를 붙잡고 쓰러뜨리고 멱살을 잡지 뭐예요.” 


사람들이 경멸에 찬 시선들이 날아와 허경일에게 꽂혔다. 돈 없는 가난하고 불쌍한 이의 멱살을 잡고 흔드는 지식인이라니. 누가 봐도 불리한 구도였다. 허경일은 천천히 행동을 멈추었다. 여전히 무엇을 도둑맞은 건지, 지금 자신이 어떤 제스쳐를 취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멀리서 파출소에서 나온 경찰들이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배우신 분이 왜 그러셨어요.” 


눈앞의 경찰이 허경일에게 물었다. 경찰서로 이송된 후였다. 허경일은 옆에 앉아있는 남자를 눈을 홉뜨고 노려보았다. 남자는 슬슬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허경일은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요새 잠을 못자서, 잠시 정신이 나갔던 것 같습니다.” 


허경일은 모든 일을 발설하게 된다면 자신이 근 6개월간 쌓아올린 것들이 모두 무너질 것이란 사실 정도는 알았다. 자신의 억울함을 열심히 경찰에게 털어놓던 남자가 허경일의 이야기를 듣고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박청학 선생님께도 사과하셔야죠.” 

“죄송합니다. 선생님.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아니요. 그럴 수 있지요.” 


고분고분하게 사과를 하는 허경일의 태도에 남자가 마음이 풀렸는지 살짝 웃어보였다. 남자의 지저분한 입 속의 더 지저분한 썩은 어금니가 다시 허경일의 시야에 잡혔다. 허경일은 부글거리는 마음을 애써 힘을 주어 눌러 앉혔다. 당장이라도 그의 멱살을 다시 잡고 어떤 기억이 떠오르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보는 눈이 많았으니까. 허경일은 지식인이었다.  


“저 혹시.” 


경찰서를 나가는 틈을 타 허경일이 남자에게 말을 붙였다. 경찰서문 앞에서 남자가 순간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허경일은 최대한 무해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두 손바닥을 들어 남자에게 보여주었다.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요?” 

“혹시 나랑 악수할 때 몰랐던 지식 몇 가지를 체득하게 되지 않으셨습니까?” 


흐흐흐. 눈앞의 남자가 기분 나쁘게 웃었다. 체득이라니, 또 어려운 단어를 쓰는군. 그가 느리게 입술을 옴짝거렸다. 허경일은 남자의 미묘한 표정을 쫓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기분이 나쁜 것인지, 아니면 그도 허경일만큼 당황한 것인지 쉽게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남자는 일순간 허경일을 똑바로 바라본 채 정색을 했다.


“전혀요.” 

“혹시 연락처라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게 있겠습니까?” 


허경일은 더 남자에게 무엇인가를 물어볼 전의를 상실했다. 남자는 더 이상 협조하지 않겠다는 듯 팔짱을 끼고 허경일을 쳐다보았다. 흐흐흐하는 비릿한 웃음이 다시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허경일은 재빨리 그의 얼굴에서 눈을 돌렸다. 기분이 나빠질 것 같아서였다. 생각에 빠져 우두커니 서 있는 허경일을 놔두고 남자는 이내 성큼성큼 경찰서 밖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남자의 회색빛 거적 대기가 허경일의 시야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남자가 걸어가는 모습 바깥쪽으로 어스름이 낀 하늘이 보랏빛을 뽐내며 모든 것을 침식할 것처럼 일렁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중요하지 않은 지식일지 모른다. 인생에는 중요한 지식만 가득 차있지는 않으니까. 지식을 빼앗기는 일은 두 번 겪어도 익숙해지기 어려운, 몹시 기분이 나쁜 일이었지만 허경일은 애써 자신이 잃어버린 기억이 덜 중요한 기억일 것이라 믿기 위해 노력했다. 빼앗긴 지식이 중요한 지식이라 할지라도 겨우 홉스에 대한 단편, 혹은 로크, 혹은 데리다, 혹은 지젝 정도이겠지. 감자탕을 팔아왔던 남자에게 그 지식들이 어떤 가치를 가질지 허경일은 골몰했다.


어쩌면 감자탕을 만드는 비법만큼, 홉스나 로크 따위의 것들은 남자에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을지 몰랐다. 그러면 쌤-쌤(same-same)이었다. 주거니 받거니 한 것도 없이. 남자가 조금 유리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그는 이제 낯선 사람에게 감자탕과 관련된 자신의 서러움을 토로하지 않아도 되는 제법 괜찮은 인생을 살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 허경일은 그저 불쌍한 한 남자의 시름을 덜어준 것일지 몰랐다. 그건 자선사업 같기도 하고 색다른 방식의 기부 같기도 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동안 허경일의 표정은 점점 밝아졌다. 아주 많은 헤프닝 중 하나에 불과한 일에 너무 화를 냈군. 자신의 바보 같은 행동들에 조금 웃음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허경일은 아직까지 남자의 앞길을 축복해줄 만큼 대인배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남자를 용서하기로 결심했다. 적어도 남자와 경찰서에 들어올 때처럼 기분이 나쁘진 않았으니까. 감자탕에 대한 이 지식도 이제 다음에 또 다른 값비싼 지식과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허경일은 젊었고, 시간은 많았다.  


다시 혜화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집 앞까지 도착했을 때 시간은 벌써 저녁 8시가 되어있었다. 저녁을 먹지 않은 탓인지 배 속에서 미세한 통증과 진동이 느껴졌다. 저녁 7시 이후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허경일이었지만, 오래간만에 저녁을 늦었더라도 먹어야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고단하고 긴 하루였으니까. 집에 가서 아내에게 밥을 달라고 해야지. 따뜻한 밥을 밥공기에 퍼 놓고, 어제 먹은 김치찌개를 데워 한 입에 삼켜 넣으면 따뜻한 감각들과 함께 모든 기분 나쁜 것들이 목구멍 너머로 흘러갈 것이다.  


허경일은 천천히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남자에게 빼앗긴 기억이 도어락 비밀번호는 아닌지, 문은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쉽게 열렸다. 허경일은 열리는 문을 보고 살짝 웃었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잊어버렸을까봐 걱정하다니. 참 나도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인가. 허경일은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문을 활짝 열었다.  


“아빠!”


그 순간, 한 번도 본 적 없는 웬 두 살 남짓의 여자 아이가 허경일의 다리에 파고들었다. 허경일은 멈칫하며 뒷걸음질 쳤다. 분홍색 공주 캐릭터가 그려진 내복을 입은 아이가 조그만 턱을 들어 허경일을 바라보다가 다시 “아빠!”소리를 내며 다시 허경일에게 다가갔다. 여자 아이 머리끝에 양 갈래로 묶인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허경일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여자 아이로부터 고개를 돌려 아내를 바라봤다. 아내는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렸다. 왜 그래? 그 고개가 물어보는 것 같았다. 허경일이 한 번 더 뒷걸음질 치자 아내가 입모양으로 허경일에게 무어라 말을 걸었다.  


‘뭐 해.’  


아내의 입모양이 그렇게 말했다. 아이가 콧물이 묻은 얼굴을 허경일의 다리에 부비는 것이 느껴졌다. 최악이었다. 이게 다 무슨. 허경일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경우의 수를 떨쳐버리기 위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럼에도 그 어느 순간보다 진하게 허경일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경우의 수가 허경일의 머리를 흔들었다. 보랏빛의 불안감이 여자아이의 뺨이 닿고 있는 다리부터 정강이, 배와 심장, 그리고 머리까지 물들이고 있었다. 허경일의 턱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보랏빛 불안감은 점점 더 선명하게 언어를 찾아가고 있었다.  


 ‘나는 눈앞의 두 살 남짓의 아이에 대한 지식을 빼앗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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