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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월의거북 Nov 23. 2017

마지막 여름에

이 시절, 이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 
한 시절을 구분 짓는 경계선으로써 계절은 그 충분한 역할을 한다. 나이는 언제부터인가 그 경계선이 모호해졌다. 내게 쌓인 해가 몇 해인지. 지금의 나는 태어난 지 몇 해 째의 나인지.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스물두 살이라 나 자신을 소개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곧 서른이라니. 누군가 내게 나이를 물으면 나는 대답하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린다. 언제부턴가 모든 것이 너무 쏜살같이 지나갔다.

그러나 계절은 뚜렷하게 한 시절을 구분 지어 준다. 체온을 통해, 풍경을 통해 그 변화하는 계절을 확인하며 아, 여름이 가고 있네, 가을이 오는 구나- 느낀다. 그리고 이 여름의 나는 어땠는지 돌아본다. 그 짦았던 한 시절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장마다. 
지난여름에는, 살을 파고드는 엄지발톱을 제대로 관리할 틈이 없어 대충 길러두고 그걸 감추려고 샌들보다는 운동화를 자주 신곤 했는데, 출근할 때 비가 오면 운동화가 젖어서 짜증스럽고, 무거운 노트북을 들고 우산까지 들라치면 버겁고 성가셨다. 얼른 비가 그쳐서 짐을 하나라도 덜고 싶은데 비는 질리도록 온다. 이런 날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만화책이라도 보고 싶은데 해야만 하는 일, 가야만 하는 일터가 있기에. 매일 눅눅한 옷과 기분으로 전철을 타고 이리저리 움직인다. 피곤하고 찝찝한 기분이 배가 되는 것. 작년의 장마에 대한 추억은 이렇다.

 그러나 이번 장마는 모든 것이 좋았다. 더위를 식혀주는 굵은 빗줄기를 보는 것도, 방 안에서 밤새 빗소리를 듣는 것도. 샌들을 신고 돌아다니다가 발이 젖고, 머리카락과 바지 밑단까지 젖어들어도, 시원한 비 냄새와, 내가 가고자 하는 곳으로 옮겨지는 발걸음과, 편안한 옷과, 넉넉한 시간이 있기에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햇볕 쨍쨍하며 무척이나 더웠던 여름날에는 온몸이 후끈해지도록 햇빛을 받으며 동네 여기저기를 어슬렁 어슬렁 돌아다니고, 더위를 피해 나무 우거진 산길로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땀 범벅이 된 채로 집에 돌아오면 한낮에 찬물로 샤워를 했다. 
 텀블러에 얼음 가득한 아이스커피를 가득 담아들고 외출하는 것도 즐거웠고, 덥고 습하지만 아침에 창으로 가득 들이치는 눈부신 햇살에 잠에서 깨는 것도 행복했다. 

마음이 무너지고 절망감에 차서 밤잠을 설치다 울고 또 울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분투해야 했던 날들도 있었지만, 이 여름 나는 나를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나의 수많은 두려움 중 가장 큰 부분이 해결되었으며, 내가 가진 작은 능력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아직 뻥 뚫린 고속도로처럼 뚜렷하고 시원한 길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무성한 숲 사이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렴풋이 보이는 오솔길 같은 길을 발견했다. 좁고 험한 길. 

다가오는 가을에 난 아마 그 길을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출처)

http://blog.naver.com/gamram_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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