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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숙 Aug 15. 2020

대형사고 쳤어요

2020.8.15.토


점심시간 무렵 아들이 왔다.

지난 주 저희들 집에서 휴가를 보낼 때 우리 차를 일주일이나 세워놔야 해서 이웃에게 피해가 갈까봐 회사 너른 주차장에 두겠다고 했다. 토요일 차를 가질러 갔더니 입구가 막혀있어서 할 수 없이 아들 차로 내려왔다.

사실은 우리 차를 주차장 한쪽에 세워두면 민폐 끼칠 일도 아닌데 아들의 결벽증이 한몫을 했다.

이미 당한 일을 어쩌겠나? 아들 얼굴 한 번 더 보라는 거겠지, 하며 넘어갔다.


그런 사연을  만든 아들이 왔다. 남편의 성화에 갈낙탕을 끓였다. 큰 시장에 가서 살아있는 낙지를 사고 싶었지만 근처 마트에서 절단한 볶음용 생물 낙지로 결론냈다. 적당히, 적당히 하자, 최면을 걸면서.

갈비는 핏물을 빼고 낙지는 밀가루로 깨끗하게 씻어두었다. 양파껍질 말린 것과 마늘, 생강을 넣어 갈비를 고았다. 하루동안 냉장고에 넣어 두어서 위에 엉긴 기름을 걷어냈다. 오늘 먹을 때 전복과 낙지를 넣어 다시 한소큼 끓여냈다.



전복갈낙탕 한그릇, 감자채볶음, 부추전, 콩나물무침으로 점심상을 보았다.

금방 가야해서 함께 못온 며느리와 꼬맹이 몫으로 두어 그릇 포장을 해서 부추전 한 장을 부쳐 들려보냈다.


그전에는 바리바리 들려보냈다. 현직 며느리인 젊은 지인이 슬쩍 귀뜸을 해주었다.

시어머니는 음식 만드느라 고생하고 며느리는 음식 먹느라고 고생한단다. 우리 며느리는 잘 먹는 편이지만 그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두 번 먹을 것만 보낸다. 아쉬우면 나중엔 더 보내달라고 하겠지.

나이 들면 지갑만 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귀를 열어야 한다. 입이 아니라.


이번 주 머리 손질을 좀 했어야 하는데 발이 묶여 못했다.

아들을 보내고 미용실에 왔다. 뉴스엔 연일 마음 무거운 소식들만 전한다. 천정부지로 오르는 집값 문제, 수해 피해, 코로나 재확산...

머리라도 가볍게 하고 싶어 미용실에 왔는데 여기서 대형사고를 쳤다.



한 할머니가 머리에 염색약을 바르고 앉아서 문재인은 골수 빨갱이다. 북한에 돈 다 퍼주고 나라에 돈이 없어서 집 있는 사람에게 세금 거두려고 부동산정책을 만들었다. 이인영도 한통속이다. 텔레비젼에서 이인영보고 이승만 대통령이 어떠냐고 물었는데 그 사람은  대통령을 해서는 안될 사람이었다고 했다고 큰소리로 떠들었다.

듣다 못한 미용실 원장님이 그렇게 아는 거 많으면 오늘 버스 타고 광화문 집회 가서 말씀하시지 다른 손님도 계시니 좀 조용히 하시라고 했다. 그래도 연신 국부를 그런 식으로 모독하면 안된다고, 국민들 모두 추운데 나와서 촛불집회 한 것을 후회한다고 야단이다.


내 인내의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한 마디 했더니 이 할머니가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게 삿대질을 하며 덤벼들었다. 나도 한칼을 보여줬다.

내 논리에 밀린 할머니는 서둘러 머리를 감고 나갔다.

나는 원장님께 시끄럽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원장님은 잘 했다면서 별명이 **타운 딱다구리인데 미용실에만 오면 그랬는데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단다. 당분간 조용할 테니 도리어 내게 고맙다고 했다.


나는 정치적인 성향은 타고 나는 거라 생각한다. 부부 간에도 다를 수 있다. 교육에 따라 성향이 바뀌는 것도 아닌 듯하다.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내 오랜 친구들과도 다르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이야기들은 공공장소에서 떠들 일은 아니다. 서로 맞는 사람들과 함께 가야 하는 것이 그 길인 것 같다.


오늘 나는  많이 부끄러웠다.

광복절인데 만세삼창할 일은 못만들고 쌈박질이라니.

나이들면서 희망사항 가운데 한 가지, 품위있게 나이 먹는 거였는데 끝까지 참지 못해서 나 스스로에게 민망하다.


멀고도 험한, 우아하게 나이 먹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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