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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를 넘어서: 포용적 글쓰기의 본질 ⑨

가이드를 지키면 포용적인 글을 쓸 수 있을까?

by Sunny Lee

지금까지 한국어 사용자를 위한 Inclusive writing을 카테고리별로 알아보았다. 많은 카테고리, 더 많은 규칙, 그보다 더 많은 예시 단어들. 이 모든 걸 어떻게 지키며 글을 쓸 수 있을까?


Inclusive Writing 가이드의 진짜 목적

이 가이드는 단어를 주입식으로 암기해서 '좋은 표현'과 '나쁜 표현'을 기계적으로 구분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자는 것이다.

핵심은 간단하다. 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을 환대하고, 자리를 마련하는 글을 쓰는 것.

그러려면 의식적으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차별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왜 차별을 하면 안 될까?

누군가를 나와 다른 존재로 여기고, 주류/비주류로 구분하고, 존재 자체를 쓸모없거나 유해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 아닌 사회적 편견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편견은 혐오로 이어지기 쉽다.

편견은 내가 주로에 속했을 때는 소속감을 주는 것 같지만, 실은 나 자신을 편협한 시각에 가둔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남성들을 '맨박스'에 가두는 것처럼 말이다. 남을 위해 편견을 버리는 것은 나에게 더 많은 가능성을 주는 일이다.

조선시대 신분제를 생각해 보자. 천민과 왕족은 평등하지 않았고 서로를 다른 존재로 여겼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안다. 사회적 편견을 걷어내고 개인을 마주하면 '다른 존재'라는 구분이 얼마나 무색해지는지 말이다.


무의식적 차별도 조심해야 할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말 실수 정도는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살다보면 누구나 하는 말 실수이니 넘어갈 수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는 그 마음, 이해한다.

신형철 평론가의 말을 빌려 이 질문에 대답하자면, 폭력이란 ‘어떤 사람과 사건의 진실에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모든 태도’이다. 무의식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섬세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내가 쓰는 표현이 차별적이라는 것을 모르고 쓰는 것과 알고 쓰는 것은 천지차이다.


한국어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마인드: 그게 그거, 좋은 게 좋은 거

한국 사회에서 포용적 언어를 쓰기 위해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이 바로 '의도가 좋았으니 좋은 걸로 쳐'라고 넘어가는 태도다. "장애우든 장애인이든 그게 그거 아냐? 좋은 게 좋은 거지."

이런 태도는 언뜻 너그러워 보이지만, 섬세한 말 고르기와는 거리가 멀다. '좋게 좋게' 넘어가는 상황에서 결국 누군가는 소외와 차별을 참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이제는 넉살 좋게 우승며 넘어가는 것을 멈추고, 예민하게 짚고 넘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

누구도 완벽하게 포용적인 말을 할 수 없다. 한 개인에게도 인종, 성별, 건강 상태 등 수많은 정체성이 교차하기에 당사자성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요한 건 그 사람을 위한 언어가 무엇인가 고민하는 마음가짐이다. 그 마음가짐만 있다면 길고 긴 가이드를 모두 외울 필요 없다.

때로는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상처주는 배타적인 말을 할 수도 있다. 그럴 때가 오더라도,

너무 자책하거나 절망하지 말자

내가 완벽할 수 없음을 인정하자

당사자만이 느낄 수 있는 것에 무지했음을 인지하자

이것을 계기로 더 나아지면 된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다행인 일이다. 무엇이 문제인지 아는 것에서부터 포용은 시작된다.

27829_44524_4327.jpg https://www.newskrw.com/news/articleView.html?idxno=27829

이것이 모두를, 그리고 나 자신을 포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다행스럽게도 한국 사회에서도 다양성 포용, 언어감수성, 차별 표현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EBS의 <당신의 문해력+>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언어 감수성 테스트를 만들었으니, 한 번 테스트를 해보는 것도 좋겠다. (Inclusive Writing을 열심히 공부했다고 자부한 나도 틀린 항목들이 몇 개 있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겠다.)




나의 이야기

휴학을 하고, 영국의 시골 마을에 있는 장애인 복지 센터에서 지냈던 시절이 생각난다. 복지 센터라기보다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모여 사는 농장 공동체였다. 나는 농장의 가장 외딴 집에서 3명의 백인 지적장애인(나이는 청년부터 노년까지 다양했다), 흑인 비장애인, 그리고 그녀의 초등학생 딸과 함께 지냈다. 돌이켜 보면 말도 안 되는 다양성을 지닌 그룹이었다.

돈이 많이 드는 영어 유학 대신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어서 간 곳이었는데, 그 경험으로 나는 내가 살던 세상이 얼마나 편협했는지 알게 되었다. 어떤 대단히 감동적인 일이 있던 것은 아니다. 그들과 함께하는 삶은 대단하지도, 감동스럽지도, 눈물의 드라마가 가득하지도 않았다. 그냥 평범한 하루였고, 삶이었다.

함께 농장 일을 하고, 집안일을 하고, 주말마다 버스를 타고 놀러 갔다. 할로윈 파티와 크리스마스 만찬을 즐기고, 한국에서 가지고 온 라면을 나눠 먹었다. 가끔은 서로를 놀리기도 하고, 서운한 마음에 화를 내기도 했다. 도움을 주기도 받기도 거절하기도 했다. 그냥 그런 삶이었다. 그 삶에서 우리는 '다른 대상'이 아니었다. 삶을 나누는 사람들이었다. 이 경험으로 나는 포용적인 태도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비포용은 타자화로부터 비롯된다

농장 공동체에서는 모두가 각자 다른 인종이었고,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지적 수준과 문화적 배경을 가졌지만, 한 공동체에서 지내는 가족이자 동료였다.

나와 다른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생각은 행동으로 이어진다. 소외, 무시, 존재 지우기, 희화화, 동정, 시혜, 낙인, 비하, 편견, 대상화, 일반화, 평가. 나와 다르다는 생각은 그 존재를 내 삶의 밖으로 밀어낸다. 나만큼이나 입체적이고 다양한 개인이라는 것을 잊은 채, 그 존재를 만화책 캐릭터처럼 납작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내가 잘 아는 사람에게라면 하지 못할 행동들을 하기 시작한다.


비포용은 흑백논리에서 시작된다

존재를 내 삶의 안과 밖으로 구분하려는 이유는 인간관계에서도 효율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한정된 에너지와 시간을 소중하게 쓰고 싶다. 그래서 그것을 누구에게 집중할지 빠르게 결정하고 싶다. 효율적인 의사결정을 위해 어떤 존재의 깊이를 이해하기도 전에 분류해 버리고 싶다. 오만하게도 그 존재를 흑으로, 백으로 깔끔하게 나눌 수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세상은 거대한 회색지대이다.

글을 읽는 다양한 사람들을 고려하는 일은 흑백논리로는 완성할 수 없다. 흑백논리로 쓰인 글은 선명하고 명쾌할 수 있지만, 그만큼 경계가 분명해 누군가를 배제하기 쉽다. 우리는 흑백논리로는 세상의 다양함을 담지 못함을 인정해야 한다. 회색의 불분명함을 포용으로 여기고, 그 속에 교차하는 수많은 다양성을 마주 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효율보다 중요한 것

시간이 돈이고, 에너지와 관심이 돈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효율은 중요한 가치다. 그러나 효율은 차별을 정당화할 수 없다. 더 나은 사회는 돈의 논리로만 움직이는 곳이 아니어야 한다.

소외되고 배제되는 곳에 시간과 관심을 돌릴 수 있어야 한다. 빼앗긴 언어를 돌려주는 것도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좋은 시작이 될 것이다. 포용적 글쓰기는 단순히 올바른 단어를 고르는 기술이 아니다. 자본과 효율보다 더 큰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 가치를 지키려는 태도다. 이것이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이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Inclusive Writing 시리즈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Inclusive Writing 시리즈
① Inclusive Writing의 시작 - 무해한 글쓰기의 시대
② Inclusive Writing으로 다양성 포용하기 / 나이·장애
③ Inclusive Writing으로 다양성 포용하기 / 젠더·인종·사회 계층
④ Inclusvie Writing 한글 패치 / 나이
⑤ Inclusvie Writing 한글 패치 / 젠더
⑥ Inclusvie Writing 한글 패치 / 인종
⑦ Inclusvie Writing 한글 패치 / 장애
⑧ Inclusvie Writing 한글 패치 / 사회 계층·문화, 정치, 종교·외모, 체형
⑨ 가이드를 넘어서: 포용적 글쓰기의 본질 ◀︎ 지금 읽고 있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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