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fom Oct 18. 2023

문제의 해답

#직업

  친구들과의 우정을 그린 전설의 드라마 '프렌즈'에서 주인공 로스의 직업은 '고생물학자'. 그는 모르는 사람에게조차 본인의 직업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하는 성격이다. 심지어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학창 시절 과학 캠프까지 떠들어대며 본인의 커리어와 직업을 남들이 알아주기 원한다. 공부 외에는 딱히 잘하는 것도 없고 여자들에게 인기도 없었던 로스는 소위 범생이 코스 완주를 통해 인정욕구를 채우며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탐구하며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묻기는 했을까? 아마도 부모 혹은 사회가 정해 놓은 코스를 잘 완주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자신에 대한 신뢰는 갖지 못한 탓에 묻지도 않은 자신의 학위와 직업을 자랑하며 자신의 가치를 끊임없이 확인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런 로스에게 나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진지한 고민 없이 대학에 입학했고 지원 가능했던 채용공고를 보고 입사했다. 입사 후에는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자격증 공부, 재무지식까지 겸비한다면 더 나은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판단하에 주중엔 새벽 기상, 주말엔 스터디를 하며 수험준비와 회사 생활을 병행하며 치열하게 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원하던 것이었는지 그리고 내가 은연중에 남들에게 드러내고 싶어 했던 보여지는 것들이 그만큼의 가치와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엔 성적과 대학 간판으로, 졸업 후에는 직장과 직위로, 취업 후에는 어디에 살며 어떤 차를 타는지로 상대를 평가하는 짜여진 프레임 안에서 나에게 직업은 없고 직장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오랜 기간 풀지 못했던 문제의 실마리를 프렌즈의 한 에피소드에서 찾았다. 로스는 조이, 챈들러 그리고 모니카, 레이철 중 어느 쪽이 서로에 대해 더 잘 아는지 묻는 스피드 퀴즈를 진행한다. 두 팀은 아슬아슬하게 동점 상황. 여성팀이 이기면 조이, 챈들러가 키우는 오리를 포기하고, 남성팀이 이기면 모니카, 레이철의 아파트를 갖는 절체절명 순간 마지막 문제이다.


 로스: 챈들러 빙의 직업은? What is Chandler Bing's job?

 레이철: 맙소사 숫자랑 관계있는 건데… Oooh... oh gosh, it has something to do with numbers...

 모니카: 자료 처리도! And processing!

 레이철: 서류 가방도 들고 다녀 And he carries a briefcase...

 로스: 이제 10초 남았습니다. 대답 못 하면 패배합니다. 10 seconds or you'll lose the game.

 모니카: 뭔가에 송신도 하고 응답도 하고… Something to do with transponding...

 레이철: 응답, 응답사! Oh oh... he's a trans... a transponster!

 모니카: 그건 단어도 아니야! THAT'S NOT EVEN A WORD!


  매일 어울리며 서로를 잘 안다고 자부하던 친구의 직업을 묻는 질문에 모니카와 레이철은 당황하다 못해 어처구니없어했고 결국 있지도 않은 단어를 말하며 패배해서 조이와 챈들러는 넓은 아파트를 차지하게 된다.  

직업을 자랑하고자 안달을 내는 특이한 성격이든,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몰라 끊임없이 찾아 나가며 좌충우돌을 하든, 그저 묵묵히 옆에서 지켜봐 주며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이 아닌 사람 자체를 보는 신뢰 있는 관계가 있다는 것이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느냐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 누구도 그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개의치 않아 하는 그런 따뜻함이 결국 자신에게 가장 맞는 직업을 찾도록 도와준다는 것이 문제를 푸는 실마리였다. 많은 이들이 프렌즈에 열광한 이유는 웃음과 재미 기저에 깔린 서로에 대한 존중과 그들 사이에서의 편안함 그리고 위로가 타인을 성장하게 해주는 힘이 있다는 진실을 일관되고 끊임없이 보여주었고 이는 나의 질문과 또 다른 수많은 고민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현재 나에겐 직업은 없고 직장만이 있다. 이직하지 않고 다닌다면 얼마나 더 일해야 하는지 인사 시스템에서 찾아보았는데 정년퇴직일은 2037년 9월 1일이었다. 그 숫자를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내게 필요한 건 그 시간까지 내가 무엇을 하게 될 것이며 평생의 직업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애쓰며 알아내려고 하기보다는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중요하지 않고 내 존재 자체를 인정해 주며 지지해 주는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려가는 것이 질문에 대한 해답임을 알게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행동경제학 관점에서 본 질투의 특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