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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정 Oct 19. 2021

산과 마주하며 걷는 일

와룡공원에서 창의문까지

말바위안내소 가는 길 / 이호정 그림



 산과 마주하며 걷는 일

 바다가 멀고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고장에서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낸 저는 어릴 때부터 산이 좋았습니다. 산은 늘 첩첩이 둘러싸여 그것을 보는 일도, 오르는 일도 언제나 기꺼운 마음이었지요. 순성을 하면서 수많은 사람의 손끝으로 고쳐 쌓았을 한양도성 자체의 유려함에 감탄해 마지않았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건 도시를 아늑하게 에워싸는 산과 마주하며 걷는 일이었습니다.


 미세먼지가 물러간 청명한 날을 아끼고 아껴 그런 날이면 산에 올랐습니다. 한양도성이 놓인 네 개의 산은 초등학생 걸음으로도 제각각 반나절이면 족할 낮은 산들이었지만, 그것이 이어져 있어서 그럴 테지요. 올라서 본 풍경은 그렇게 장쾌할 수 없었습니다. 저에게 순성이란 산을 걷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본 산과 그 너머의 산, 이어지는 성곽 자락과 그들이 에워싼 도시, 앞뒤로 걷던 모르는 사람들도 오로지 눈이 부시도록 푸른 하늘 아래, 조금 높기도 하고 조금 낮기도 했던 산의 형태로 기억 속에 남게 되었습니다.


 백악산은 아이들과 열 번째 답사로 간 곳이었습니다. 단풍은 아직 멀었지만, 어차피 울긋불긋 물이 드는 산은 아니었지요. 울창한 수목들이 록에서 록황으로 변해가던 10월의 가운데였고, 하늘은 맨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푸르렀습니다. 암문 밖에 둘러쳐진 철조망이 무섭다면서 찡찡거리던 아들을 달래줄 생각은 않고, 다리 아프다며 청운대로 향하는 오르막길에서 심통이 난 채 터덜터덜 걸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제는 정말로 가던 길을 멈출 수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길을 걸어 전망대에 올랐을 때 우리는 웃었고, 마주 오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지금 너희들과 나는 왜 여기 있는 걸까. 이유도 모른 채 산이 있고, 그 사이로 성곽은 실타래처럼 이어지고, 결코 다가갈 수 없는 견고한 자세로 보현봉 저 봉우리가 우리를 굽어보고 있었습니다.



 “얘들아, 저기 삐딱한 바위봉우리 보이지? 
  저기가 바로 보현봉인데, 엄마도 예전에 딱 한 번 가봤어!”



 아이들 귀에 대고 혼자 떠들어대면서도 저는 그것이 좋았습니다. 순성길에서 숱하게 보았던 저 봉우리가 엄마가 옛날에 딱 한 번 가보았던 보현봉이라고 말해 줄 수 있어서….


 안국역을 나와 종로02번 마을버스를 타면 버스는 북촌을 가로질러 성균관대 후문으로 우리를 데려다주었습니다. 거기서 데크를 따라 조금 올라가면 와룡공원이었지요. 우리는 와룡공원에도 참 많이 왔습니다. 성북동에서, 종로에서, 마을버스 타고서, 때론 걸어서…. 그 앞 정자에 앉아 푸드 트럭 아저씨가 딱 알맞게 끓인 물로 부어준 컵라면을 맛있게 먹던 일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거기서 창의문까지는 순성길인 동시에 등산길입니다. 중간에 빠져나갈 다른 샛길도 없이 산을 오르는 일이란 원래가 그렇게 올라갔다 다시 내려오는 싱거운 일이란 걸, 그 하릴없는 행위의 본질을 우리는 이 산을 걸으며 또 알게 될 테지요.


 백악산 순성길은 도심 쪽으로의 시야는 지형과 보안상 이유로 자주 막혀 있지만, 대신 반대편으로 북한산의 주능선을 통째로 마주하며 걷게 됩니다. 거기서 바라보는 풍경들은 또 어찌나 근사한지, 산 다니던 시절의 그리움으로 돌아본 자리마다 마음 울렁울렁해지던 기억들이 저 능선, 저 봉우리 어디 즈음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11월도 벌써 중순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침엽수들이 푸릇한 기운을 내뿜고 있지만, 우리가 보았던 한여름의 푸릇함은 아닌 거지요. 적갈색으로 물든 관목 덤불들이 이제는 가을도 끝물임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익숙한 성곽길을 따라 천천히 말바위 안내소를 향해 걸어갔어요. 이번엔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날은 좋고, 시간은 아주 많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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