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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정 Oct 20. 2021

다시 시작되는 여정

와룡공원에서 창의문까지

창의문 가는 길 / 그림 이호정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그것은

 한양도성과 그곳으로부터 이어진 길을 따라 아이들과 함께 걸었습니다. 걷고 멈추기를 반복하면서 막연히 찾고 있던 그것이 그 길 어딘가에 놓여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길이 있다면 그건 남의 길이랬지요. 저기 유난히 곧게 뻗은 길도 분명 남의 길일 것입니다. 애쓰며 걸어가는 이 길이 나의 길이라 믿으며, 어제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오늘 그랬던 것처럼 내일도 그렇게 걸어갈 뿐입니다.


 먼저 가겠다며 성큼성큼 앞서가는 아이들 뒤에서 저는 점점 작아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봅니다. “엄마! 왜 안 와!? 빨리 와!” 재촉하는 아이들 성화에 가고 있으라며 손을 훠이훠이 내저으면서도, 결국 멈춰선 채 저를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 손을 가만히 쥐어봅니다. 어린애다운 따뜻하고 보드라운 손바닥의 온기가 전해집니다.


 맞은편 인왕산에는 한눈에 보아도 한양도성임을 알 수 있는 백색의 라인이 산자락을 타고 굽이지고 있습니다. 지금 저곳을 내려오는 사람들은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겠지요. 그새 창의문 낮은 지붕이 보입니다. 그 지붕 너머로 한양도성은 또다시 이어지고, 넓게 그늘을 드리우던 소나무도, 시인의 언덕에서 마음 울컥해진 채 시비詩碑 앞을 서성이던 사람들도 모두 그대로였습니다.


 창의문 홍예를 지나면 낯익은 부암동 동네가 눈에 들어옵니다. 너무도 익숙한 탓에 오래전부터 살고 있던 것처럼 느껴지지만, 연신 두리번거리는 까닭에 자하문고개를 넘어 먼 데서 온 사람이란 걸 금세 들키고 말겠지요. 부암동주민센터 정류장으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늘 그랬듯 모르는 사람들과 나란히 서서 다시 자하문고개를 넘어갈 버스를 기다립니다.


 성벽, 돌, 성가퀴, 낡은 기와, 그리고 묵은 이끼가 낀 틈새 사이로 오래된 바람이 불어옵니다. 신영복(1941-2016)은 그의 책 ‘강의’에서 이렇게 이야기했지요.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라고…. 여정의 끝에서 깨달은 건 한 도시의 미래도 과거로부터, 또 외부가 아닌 내부로부터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엄청나게 대단하고, 어마어마한 무언가가 아니었습니다. 한두 방울 흩뿌리던 비가 소나기가 되어 지나가던 낙산에서, 한양의 골격이 그림같이 펼쳐지던 인왕산에서, 아름다운 옛 지도를 떠올리게 했던 남산에서, 긴 성벽을 따라 영차, 영차 힘내서 올랐던 백악산에서, 그리고 그것을 하나로 이어주던 한양도성이라는 성곽길을 아이들과 함께 걷고, 함께 보았던 풍경들이었습니다.


 어쩌면 개인의 미래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쭉 뻗은 미래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게 아니라, 돌고 돌아 처음 섰던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다시 돌아온 자리에서 마주한 나의 모습이 기대했던 것과 영 다를지라도, 한 손에는 지나온 길과 나아갈 길을 응시할 아주 조금의 용기를 쥐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러기 위해 한양도성보다 더 좋은 길이, 여기 한양도성을 한 바퀴 도는 일보다 더 좋은 경험이 있을까 싶습니다. 교통카드와 물, 그리고 한 덩이의 삼각김밥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든, 어떻게 시작하든, 일단 돌면 한 번은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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