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의 카페
인솜니아, 불면의 카페
학창시절, 환한 낮엔 실컷 놀다가 밤이되면 주섬주섬 책을 꺼내 시험공부를 하던 날이 많았다. 놀고 있을땐 ‘이따 밤에 하면 되지 뭐.’ 하는 마음을 핑계삼아 놀 수 있었고, 밤엔 어차피 놀 수 없으니 공부라도 하면되니까 나름대로 매우 합리적인 생각이라고 자부했다. 밤이란 영원할 것만 같고 낮보다 훨씬 길게 느껴지며 차분하고 안정적이라서 집중력도 더 올라가니까…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나의 야행적 활동이 시작되었다. 밤 9시가 되서야 시작되는 시험공부, 하지만 10시부터는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이 줄줄이 있어서 사실 공부에 집중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시절 청소년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별이 빛나는 밤에’는 어두운 밤 몇시간을 환하게 밝혀주는 등불 같았고, 하루라도 그 방송을 듣지 못하는 날엔 왠지 남들은 다 보았던 그 빛나는 별을 나만 못 본 것 같은 소외감과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새벽 두시가 되서야 마무리 되는 나의 라디오 청취와 몇몇 방송에 보내기 위해 연습장에 끄적이던 사연 편지들은 또 얼마나 아침을 미루어 왔던지. ‘밤’ 이라는 시간은 단지 시간적 의미가 아니었다. 몇시가 되었던지간에 ‘밤’은 ‘어두움’이어야 했고, 나 자신은 어두움 속에 빛나는 별이되어야 했다. 비록 아무도 그 별을 보지 못하더라도 스스로는 최소한 따듯함과 함께 온세상이 나에게 집중되는 착각에 빠질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일랜드의 여름은 밤 10시가 되어도 ‘밤’이라고 하기엔 너무 환한, 여전히 대낮처럼 환하고 세상이 활동하는 부산함이 느껴지는 곳이다. 새벽 세시가 좀 넘으면 환해지기 시작해서 밤 11시즘은 되어야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여행오는 사람은들은 활동시간이 길이서 좋다고 하고,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회사 퇴근 후에도 한바퀴를 다 돌수 있다며 기뻐하기도 한다.
그런 여름이 나에겐 오히려 지치는 듯 한 시간이다. 밤이 짧으니 자연히 수면 시간이 짧아지기 때문에 피곤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나에게 쉬는 시간이란 조용히 앉아 하루종을 머리속을 맴돌던 잡념을 은은한 음악과 함께 정리하며 노트에 끄적이기도하고 내일을 계획하기도 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밤이 짧아지면 명상과 사색은 커녕 하루하루 쌓여가는 설거지를 며칠씩 하지 않고 쌓아두는 것 같은 개운치 못한 감정상태로 버티는 것이다.
다행히도 겨울이 되면 반대의 상황이 된다. 오후 네시면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다음날 아침 9시즘이나 환해지는 겨울은, 그야말로 환상적인 휴식환경이 조성된다. 으실으실 비오고 바람부는 겨울날 거실의 벽난로에 장작을 지피며 빠삭빠삭 나무 쪼개지는 소리와 함께 깊어가는 밤을 함께 세어가는 것은 내 삶의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그러면 나는 남들이 다 좋아하는 여름을 싫어하고 남들은 모두다 짜증내고 싫어하는 겨울을 좋아하는가? 그렇지 않다.
몇 년전부터 우리동네에 상륙한 ‘인솜니아’!
아일랜드 브랜드의 커피전문점 ‘인솜니아’는 커피가 주는 휴유증이나 단점으로 인식되는 ‘불면증’을 기발하게 활용한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밤에 잠이 오지 않을까봐서 커피를 자제한다고 하는데, 나는 밤에 잠이 오지 않는 것을 즐기기 때문에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인솜니아’ 카페의 발견은 얼마나 큰 반가움이고 고마움이었겠는가. 마치 세상 어딘가에 숨어 있던 단짝을 만난 것 같았다.
우리집에서 차로 십여분 가면 마을 상가에에 있는 ‘인솜니아’가 나의 단골집이었다. 그런데 지난해에 내가 다니는 은행 바로 옆에 깔끔하고 새련된 ‘인솜니아’가 새롭게 오픈했다. 하여 며칠에 한번즘 은행에 갈때면 아침내내 공복 상태를 유지한다. 공복상태를 채워가는 카푸치노의 인밀함을 느끼기 위해. 은행 문이 여는 10시즘 되서는 화장으로 단장하고, 예쁘게 머리도 드라이로 말아올리고 외출을 한다. 은행에 가는 사람치곤 너무 요란하고 짐이 많기도 하다. 공책도 챙기고 며칠 모아진 여행정보와 집에 허락도 없이 배달되는 광고지도 챙기고 여행객들을 위해 준비하던 미완성 자료들도 프린트해서 챙겨간다. 중요한건 이런 모든 정보가 다 들어있는 노트북은 절대 챙기지 않는 것이다. ‘인솜니아’카페에 간다는 것은 학창시절 즐기던 밤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아날로그 시대에 해 왔던 방식의 행동을 그대로 재연하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침 11시즘에 ‘인솜니아’에 오는 사람들은 주부들도 있고 가끔 주변 직장인들도 오고 학생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거의 텅빈 카페를 내가 독차지 할 때가 많다. 카페는 아침일찍이나 점심시간즘에 붐비는데 11시즘이 가장 한가한 시간인가보다. 그러니 나의 ‘시간으로의 여행’을 위한, ‘낮을 밤으로’ 바꿀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는가!
오늘도 인솜니아에 들렀다. 그랜드 사이즈 카푸치노와 크로와상 하나를 주문하고 카페 안을 스캔한다. 어느자리가 가장 어둡고 눈에 띄지 않는 곳인지. 커피가 나오기 전에 가방과 코트를 눈도장 찍은 자리에 가져다 두고 다시 카운터에 와서 카푸치노에 초콜릿 가루를 살살 뿌린뒤 자리에 돌아온다. 그리고 ‘인솜니아’의 시간이 시작된다. 빛나는 별도 없고 세상이 어둡지도 않지만 나의 밤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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