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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좋은 ㅎㅏ루 Dec 30. 2018

아시아의 맥주, 일본과 중국의 라거 이야기





아시아에서 맥주 문화가 가장 발달한 나라를 꼽으라면 단연 일본일 것이다. 일본은 일찍이 문호를 개방하여 요코하마 등에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는데 그들로부터 자연스럽게 맥주가 소개되었다. 일본인 자본가들은 장차 알코올이 들어 있는 음료가 장래성이 있을 걸으로 보고 맥주 사업에 뛰어들었다. 맥주를 국내에서의 수요뿐만 아니라 수출 품목으로도 유망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처음 삿포로에서 시작한 맥주 회사는 일본 내에서의 수요에 따라 도쿄와 오사카에서도 생겨났다. 일본의 맥주 회사는 외국인이 운영하던 맥주 양조장을 인수하여 설립하기도 하였고, 외국으로부터 선진 맥주 기술을 도입하여 자체적으로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일본은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이 서구 열강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맥주를 받아들이기 전부터 맥주 산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맥주를 발전시켰다.

 

현재 일본에는 삿포로 맥주, 아사히 맥주, 기린 맥주, 산토리 맥주, 오리온 맥주, 대형 맥주 회사가 5개가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에 맥주를 생산했던 회사는 삿포르 맥주와 아사히 맥주, 기린 맥주 그리고 지금은 삿포로 맥주에 합병이 된 에비스 맥주가 있다. 이 중 일본 맥주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4개 맥주의 탄생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일본 맥주 회사의 설립년도와 맥주 생산년도



삿포로 맥주의 탄생


삿포로 맥주의 역사는 홋카이도 개척의 역사라 할 수 있다. 1869년 메이지 유신의 신정부는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홋카이도에 '홋카이도 개척사'를 설치하였다. 정부는 이곳에 일본인을 강제로 혹은 자발적으로 이주시키고 아이누 민족들이 살던 땅을 '홋카이도'라 부르며 그들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신사업 육성을 위해 30종 이상의 관영 공장을 설치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맥주 양조장이었다. 맥주는 요코하마 등에 거주하는 외국인들로부터 수요가 있었고,  장차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음료로 국내 소비 및 수출이 유망한 사업으로 기대했다. 이런 점에서 홋카이도는 맥주 생산을 위한 최적의 장소였다. 홋카이도는 맥아 보리를 자생적으로 재배할 수 있어 원료를 자급자족할 수 있었고, 맥주를 저온에서 발효시키기 위해 필요한 얼음이 있었으며, 전체적인 기후와 풍토가 유럽의 맥주 벨트(아일랜드, 영국, 독일, 벨기에 등 유럽의 맥주 생산 국가가 위치한 지역을 일컫는 말)와 비슷하였다.


1876년 홋카이도 개척사는 '삿포로 맥주 회사(Sapporo Breweries Ltd)'를 설립하고 나카가와 세이베이를 일본 최초의 브루어마스터로 삼았다. 나카가와 세이베이는 일본을 떠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었던 19세기 후반에 17세의 나이로 일본을 떠나 독일에서 맥주 양조 기술을 배우고 돌아온 인물이었다. 이렇게 하여 이듬 해인 1877년 일본에서 최초로 자국인들에 의해 맥주가 탄생하였다. 이 맥주의 이름은 '삿포로 라거'로 라거 스타일의 맥주를 표방하였으며 병의 라벨에는 붉은 별이 그려져 있었다. 붉은 별은 홋카이도 개척사의 북진 깃발에 있는 별을 의미하는 것으로 '북극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를 '아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좌)삿포로 라거 라벨, (우) 1964년 삿포로 맥주 주식회사로 사명 변경




에비스 맥주의 탄생


삿포로 맥주가 탄생한 지 10년 후 맥주 사업의 장래성에 기대하는 자본가들이 크고 작은 맥주 회사를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그중 하나가 도쿄의 긴자에 세워진 양조장이었다. 맥주 사업의 장래성에 주목한 도쿄와 요코하마의 자본가들이 모여 일본 최고의 맥주 회사를 만들자는 목표로 1887년에 '일본 맥주 양조 회사'를 설립하였다. 주변이 온통 밭이나 산림 지대이고 민가도 없는 땅인 지금의 도쿄 메구로구 미타 지역에 맥주 양조장을 건설하고 3년 후인 1890년에 '에비스 맥주'룰 생산하였다. 에비스 맥주가 생겨났을 당시 일본 전역에는 100 ~ 150 정도의 소규모 맥주 공장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맥주의 품질이 떨어져 대부분의 공장들이 몇 수년 사이에 사라졌다. 이런 맥주공장들과 달리 에비스 맥주는 독일로부터 맥주 양조 기술자를 초빙하고, 모든 양조 장비를 독일에서 수입했다. 에비스 맥주는 맥주 맛을 아는 외국인들에게 호평을 받았으며, 당시 인기가 있었던 신문에서 '에비스 맥주는 외국산 맥주의 판매에 큰 영향을 끼지고 있다'라는 기사까지 나올 정도였다.

일본 맥주 양조회사와 1890년 처음 발매된 에비스 맥주



기린 맥주의 탄생


1870년 노르웨이 출신의 미국인 윌리엄 코플랜드는 요코하마의 외국인 거류지에 '스프링 밸리 브루어리'를 개설한다. 대중에게 맥주를 판매하는 회사로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설립된 양조장이었다. 주변에 있는 연못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을 사용하고, 주변 언덕 210m를 파내어 맥주를 저장했다고 한다. 요코하마의 날씨는 여름에도 온도가 그다지 높지 않아서 맥주 숙성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이렇게 생산된 맥주는 요코하마 주변의 술집에 판매되기도 하고, 코플랜드가 직접 오픈한 '스프링 밸리 비어 가든'에서 외국인 거주자와 외국인 선원들을 상대로 판매하였다. 맥주의 평판은 점점 좋아져 도쿄와 나가사키까지 출하하게 되었다.   


한편, 거의 비슷한 시기 거의 비슷한 지역에 일본 최초의 양조장이 있었다. 스프링 밸리 브루어리보다 앞선 1869년에 독일 출신의 양조자 비간트(E. Wiegand)가 설립한 '재팬 요코하마 브루어리(후에 바바리안 브루어어리가 된다)'이다. 두 양조장은 금세 경쟁 관계가 되어 맥주의 가격은 싸지고, 노동자의 인건비는 늘어났으며, 이익은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이에 코플랜드는 비간트를 찾아가 경쟁을 끝내고 두 양조장을 합칠 것을 제안하였다. 이렇게 하여 1876년 두 양조장이 합해져 '코플랜드 앤 비간트 상회'가 생겨 났다. 코플랜드가 지배인으로 일하고 비간트가 맥주 제조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둘의 사이는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공장 경영의 주도권을 두고 대립하여 타협할 수 없는 지경까지 간 것이었다. 결국 재판까지 가서 상회는 해산되고 공장을 경매하게 되었다. 경매의 결과로 양조장을 코플랜드가 다시 낙찰하여 스프링 밸리 브루어리라는 이름으로 맥주 제조를 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는 외국인 거류자뿐만이 아니라 일본인을 위한 맥주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양조장 인수 시에 쌓인 빚으로 1884년에 파산에 이르게 되었다.  스프링 밸리 브루어리는 일본 맥주 산업의 선구자적인 기업이지만 외국인이 세운 회사여서 일본 최초라는 칭호는 받지 못하였다.


1885년, 맥주 사업의 장래성에 주목한 미츠비시의 2대 총수인 이와사키는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 스프링 밸리 브루어리를 인수해 '일본 양조 회사'를 설립하였다. 일본 양조 회사는 스프링밸리 브루어리의 직원 대부분을 인수하는 한편 기존의 양조 설비는 매각한 후 독일의 최신 설비를 도입하였다. 1888년, 일본 양조 회사는 메이지 상점과 총판 계약을 맺고 '기린 맥주'를 개당 18전에 발매하기로 하였다. 1907년, 미츠비시 재벌과 메이지 상점이 출자하여 외국인 자본이 없는 완전한 일본 국적의 새로운 회사인 '기린 맥주 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기린 맥주의 전신인 스프링 밸리 브루어리와 창립자 윌리엄 코플랜ㄷ



아사히 맥주의 탄생


1889년 오사카에서는 아사히 맥주의 전신이 되는 '오사카 맥주 회사'가 설립되었다. 삿포로 맥주 회사, 일본 맥주 양조회사(에비스 맥주)에 이어 잇따라 설립된 회사로 일본의 맥주 산업의 융성 시대를 맞이하였다. 오사카 맥주 회사는 당시 동일본에만 편중되어 있던 맥주 산업을 서일본의 수요를 보고 오사카에 설립한 것이었다. 1891년에 스이타 마을 양조장(현 아사히 맥주 스이타 공장)을 준공하고 이듬해인 1892년 '아사히 맥주'를 처음으로 발매하였다.


1906년에는 일본 맥주 산업에서 큰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아사히 맥주의 전신인 오사카 맥주 회사, 에비스 맥주를 생산하던 일본 맥주 양조 회사, 삿포로 맥주 회사를 합병하여 '대일본맥주 주식회사(대일본맥주)'를 설립한 것이다. 이 합병을 주도한 인물은 '일본 맥주의 왕'이라 불리는 '마코시 쿄헤이'였다. 쿄헤이는 이벤트와 광고, 프로모션을 포함한 판매 전략의 귀재라 불렸다. 쿄헤이는 일본 내각에 '국내의 과다 경쟁을 배제하고, 수출을 촉진하며, 자본의 집중을 도모하기 위해 합병이 필요하다'라고 역설해 맥주 회사의 합병을 이끌어 냈다. 이 세 개의 회사를 합치면 점유율 70% 정도가 되었고, 대일본맥주는 2차 세계대전 직후까지 독과점 형태를 이어갔다.


대일본맥주는 1907년에는 도쿄 맥주를 생산하던 도쿄 맥주 회사를 인수하였고, 1933년에는 유니온 맥주와 미츠야 사이다를 생산하던 일본맥주청천(日本麦酒鑛泉)을 인수하였으며, 1943년에는 사쿠라 맥주 회사를 합병하면서 몸집을 불렸다. 또한 대일본맥주는 한국과도 인연이 있는데, 1933년에 조선의 자본과 절반씩 합작하여 자본금 600만 엔으로 현재의 진로하이트(주)의 전신인 '조선 맥주 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독일의 조계지인 청도를 일본이 관리하게 되어 독일 자본에 의해 세워진 칭다오 맥주의 경영권을 1914년부터 1945년까지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전후 재벌 해체의 여파를 받아 1949년 서일본에서 판매하는 아사히 맥주(현 아사히 그룹 홀딩스)와 동일본에서 판매하는 일본 맥주(현 삿포로 홀딩스)로 분할하게 되었다. 분할 시점에서 맥주 시장 점유율은 일본 맥주(현 삿포로 맥주)가 38.7%, 아사히 맥주가 36.1%, 기린맥주가 25.3%였다고 한다.

1937년 아사히 맥주 광고




역사 기록에 의하면 중국은 메소포타미아보다 맥주의 역사가 오래되었다. 중국에서 맥주를 생산하고 소비했던 기록은 지금으로부터 약 9,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의 한 마을에서 BC 7,000년 경 맥주와 같은 형태의 알코올 음료를 제조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견되었다. 쌀과 꿀, 과일 등을 만들어진 초기의 맥주는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맥주와 유사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재의 방식의 맥주가 도입된 건 겨우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안타깝게도 중국은 외세에 의해 점철된 역사 속에서 서구 열강들의 필요에 의해 맥주 공장이 건설되었다. 중국에서의 혼란과 전쟁으로 인해 맥주 공장 또한 온전하지 못했다. 한때 일본이나 소련의 소유권 속에 있었던 맥주 공장은 중국 국영의 관리하에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중국 맥주 회사 중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2개의 회사 하얼빈 맥주와 칭다오 맥주의 탄생에 대해서 살펴보려 한다.



하얼빈 맥주의 역사


하얼빈 맥주(Harbin Brewery)는 1900년도에 설립된 중국 최초의 맥주회사로 중국에서 4번째로 큰 맥주 회사이다. 폴란드 출신의 독일인 얀 노블스키(Jan Wróblewski)가 중국 북부의 만주 지역에 처음으로 맥주 양조장을 설립하였다. 양조장을 세운 최초의 목적은 1898년에 처음 시작한 만주 철도 사업에서 일하는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맥주를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1908년에 회사 이름을 글로리아(Gloria)로 바꾸고 1932년에 다시 하얼빈 양조 공장(Harbin Brewery Factory)으로 바꾸면서 중국인과 체코인이 회사를 공동으로 경영하였다. 하지만 소련이 만주를 점령한 1946년 이후 회사의 경영권을 소련의 퀼린 주식회사(Quilin Stock Company Limited)에게 뺏기었다. 이러한 상황은 소련의 스탈린(Stalin)이 중국의 자산을 반환한 1950년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하얼빈 맥주 회사는 이름을 하얼빈 맥주(Harbin Brewery)라고 변경하고 중국 정부가 운영하는 국영 기업이 되었다. 1959년 대기근이 발생했을 때 쌀 대신 옥수수를 넣고 맥주를 생산하기도 하였다. 하얼빈 맥주는 2003년에 지분의 29.6%를 사브밀러에 매각한 이후 사브밀러가 앤하이저-부쉬에 매각된 이후 현재는 앤하이저-부쉬 인베브의 소유이다.



칭다오 맥주의 역사


칭다오 맥주(Tsingtao Brewery Co. Ltd.)는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맥주 양조장으로 중국 내에서는 15%의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칭다오는 1897년 청 제국이 해남 지역의 방어를 위해 요새화를 만들기로 작정하고 건설하였던 도시였다. 이 과정을 일일이 지켜보고 있던 독일 제국은 칭다오 요새를 점령하고 청 제국에 칭다오 지역을 넘겨줄 것을 요청하였다. 현대화하지 않은 방어 체계를 가지고 있던 청 제국은 독일 제국에 칭다오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칭다오를 점령한 독일인들은 독일로부터 맥주를 수입하여 마셨으나 그들의 전통에 따라 지역에 맥주 공장을 짓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던 차에 주변의 라오산이라는 곳에서 질 좋은 지하수를 발견하게 되어 맥주 공장을 짓는 것이 본격화되었다. 1903년 홍콩에 본사를 두고 있는 독일과 영국의 합작 증권 회사인 앵글로-저맨 양조 회사(Anglo-German Brewery Co. Ltd.)가 칭다오 양조 회사(Tsingtao Brewery)을 설립하고 이듬해인 1904년 독일의 설비와 원재료를 들여와 처음으로 맥주를 생산하였다.  


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하자 칭다오의 양조 회사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1916년 상하이에서 열린 총회에서 독일이 가지고 있던 70%의 지분을 일본의 대일본맥주에 넘기는 걸로 결정되었다. 이후 일본도 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에 항복하자 잠시 동안 중국의 쯔이(Tsui) 가문이 소유하고 민족주의 정부가 감독하는 형태로 1949년까지 유지되었다. 1949년 내전 후 정권을 잡은 중화인민공화국은 칭다오의 모든 사유 재산을 금지하고 국가 소유의 기업으로 전환하였다.


칭다오 맥주는 90년대에 들어 민영화되었다. 1993년에는 칭다오에 있는 다른 세 개의 양조장과 합병하여 칭다오 맥주 유한 회사(Tsingtao Brewery Company Limited)라고 하였다. 한 때 앤하이저-부쉬가 칭다오 주식의 26.9%를 소유하였는데 그중 19.9%는 2009년에 일본 아사히 맥주에 매각하였고 남은 7%는 중국의 거물 첸 파슈(Chen Fashu)에게 팔았다. 2017년 아사히 맥주는 칭다오 지분 19.9%를 시장에 내놓았다. 일본이 중국과의 영토분쟁으로 관계가 악화되고 이미 가지고 있는 유럽 브랜드에 집중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아사히의 지분은 결국 중국의 포선 그룹에 팔렸다. 칭다오가 설립된 지 100여 년만에 독일과 미국, 일본을 돌고 돌아 온전히 중국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글을 마치면서 아시아의 라거, 아니 일본식 라거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현재 일본을 지배하고 있는 맥주의 맛과 한국의 대체적인 맥주의 맛은 어쩌면 아사히 맥주에서 나온 것일지 모른다. 한 때 아사히 맥주는 기린 맥주와 삿포로 맥주에 밀려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런 아사히 맥주를 살린 맥주가 1987년에 발매된 ‘아사히 슈퍼 드라이’였다. 당시 새롭게 취임했던 아사히 맥주 사장은 아사히 맥주의 맛을 변경하기로 결심하고 도쿄와 오사카에서 2회에 걸쳐 소비자의 미각 선호도를 조사하였다.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당연히 좋은 맥주라고 생각했던 쓴맛과 풍미가 강하고 무거운 맥주보다는 쓴맛뿐만 아니라 입에 포함되었을 때의 감칠맛(고쿠, コク)과 목 넘김이 편안한 맛(키레, キレ)을 선호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아사히는 맥아의 풍미와 쓴맛을 떨어 뜨렸지만 어느 음식이나 어울릴 수 있는 드라이한 '아사히 슈퍼 드라이' 맥주를 만들어 냈다. 이 맥주는 발매 당시 언론의 호의적인 취급은 받지 못했다. 하지만 출시 후 수도권 한정으로 발매하려던 계획을 빠르게 수정하여 전국 발매가 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아사히 슈퍼 드라이는 그 해 닛케이 신문에서 뽑은 히트 상품이 되었고, 이듬해인 1988년에는 삿포로 맥주를 제치고 점유율 2위를 차지하였으며, 1998년에는 결국 맥주 분야 점유율 1위를 차지하였다. 아사히 맥주 스타일은 곧바로 일본의 다른 맥주 회사에서도 도입하게 되었고, 한국에서도 경쟁적으로 드라이한 맥주를 강조하기 시작하였다(80년대 한국에서는 OB 슈퍼 드라이와 크라운 슈퍼 드라이가 경쟁을 벌였다). 아사히 맥주는 맥주 애호가들이 보기에는 제 맛이 나지 않는 밍밍한 맥주에 가깝다. 하지만 아시아의 식탁 위에 올라오면 상황이 달라진다. 아시아의 기름지고 짠 음식에는 풍미가 강한 맥주보다는 오히려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드라이한 맥주가 어울렸던 것이다. 최근에서야 에비스의 필스너 맥주와 산토리의 필스너 맥주가 선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아사히의 드라이한 맥주는 건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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