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와 지금
지금 병원이다. 엄마한테 왔다. 지난번에 엄마 집에서 꺾어온 도라지꽃이 아직도 피어있다. 보통 흙에서 피었을 때는 하루면 지는 것 같은데 물속에서는 아주 오래간다. 닷새는 더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싱싱하다. 엄마가 살짝 멍한 표정으로 앉아계시다가 내가 도라지꽃이 아직도 피었다고 감탄하자, 그래 그렇더라 하시면서 눈을 반짝거리신다.
4년 전 오늘에 엄마와 관련해서 두 개의 사진이 떠올랐다. 그때 복숭아를 사서 엄마에게 갔었나 보다. 그리고는 엄마에게 깎아달라고 한 것 같다. 이쁘게 생긴 복숭아 두 개에 칼금을 넣으시고 조각을 내어 주셨었다. 손에 묻히기 싫어하는 딸 생각해서 포크도 직접 갖다 주셨더랬지. 엄마랑 나랑 복숭아를 하나씩 맛있게 먹었었다. 엄마 손가락 끝에 매달린 연한 주황색의 복숭아 물이 생각난다. 사진 속에서 달 큰 향기로운 복숭아 향기가 풍겨 나는 것 같다.
며칠 전에 병실에서 복숭아를 깎아드렸었다. 몇 조각 안 드셨다. 양껏 먹었다가 탈 날까 봐 안 드시겠단다. 몇 년 사이 음식을 드시고 몇 차례 탈을 겪으시고는 먹는 것을 상당히 조심스러워하신다. 어제 잠깐 열이 났다고 하시더니 오늘은 아예 한 조각도 안 드시겠다고 하신다. 복숭아를 깎으려다가 다시 냉장고 속에 넣어버렸다. 냉장고는 문이 닫히기도 전에 불이 꺼져버렸다. 복숭아는 차갑고 깜깜한 냉장고 속에 있다.
그때 복숭아를 다 먹고 엄마가 좋아하시는 노래 가사를 프린터로 출력해 드렸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앞만 보고 왔는데......' 효도 엠피쓰리로 노래를 들으시면서 큰 글씨로 된 가사를 따라 부르셨다. 흥얼흥얼 노래 몇 소절 따라 하시다가 갑자기 "난 병원은 안가!" 하셨었다. '서산 넘어가는 청춘'이라는 구절에서 나이가 더 들었을 때가 걱정이 되셨던 걸까. 몸이 힘들어져 혼자 살 수 없어도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은 가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으리라.
4년 전, 그때는 엄마가 손수 마당에서 꽃을 꺾어 내게 꽃다발을 만들어 주셨었다. 그럴 정도로 무릎과 허리에 힘이 있었다. 그때는 엄마가 손수 과일을 씻고 자르는 일을 하실 수 있었다. 그런 일을 하시는데 무리가 없을 만큼 걷는 동작과 손동작이 가능했었다. 그때는 복숭아 하나를 다 드실 수 있었다. 그래도 탈이 나지 않을 정도의 소화능력이 되었었다는 얘기다. 그때는 더 늙게 되더라도 병원에서 살지는 않겠다고 힘 있게 말씀하셨었다. 남의 일처럼 먼 일처럼 명랑하게 말씀하셨었다. 그때는 그랬었다.
엄마가 누워계신 침대 발치로 오후 햇살이 들어온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허리를 가누지 못해 기어 다니느라 생긴 무르팍 굳은 살에 햇살이 앉는다. 다행히 보라색 도라지꽃에도 햇살이 건너간다. 덕분에 꽃이 환해보인다. 오늘은 그렇다. 그렇게 지금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