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신림역 4번 출구

by 무릎

신림역 4번 출구 / 무릎


노인이 나타나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의족 옆 모금통은

네모보단 조금 더 다정한 모양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덮다가 덮다가

덮어야 하는 걸 덮을만한 면이 없을 땐

마지막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치부도 엄살인 양

내 몸도 아닌데

흉터 날 것 같은 불안들이 도처에 불어난다

아마 노인도 그즈음에 다리를 뽑아 들었을 테다


발 밑으로 소란만 한 진동이 친다

열차가 저 아래에서 무언가를 덮으려나 보다

잠깐일 것이다, 우리처럼

의심으로 진심을 쉽게 덮어버릴 수 있는 것처럼

열차는 금세 덮었던 지하의 지하를 내어준다


그 노인은 지금 몇 층에 있을까?

늘 세워져 있던 노인의 아프지 않은 다리를 떠올리면

내 몸의 가장 밑단도 어쩐지 무릎이어야 할 것만 같은데

사람들이 내 뒤에서

“지나갑시다.” “지나갑시다.” 한다

나는 지나가야 하는 사람을 위해

지나가지 않을 수 있다


노인이 등을 대고 있었던 벽은 문처럼 생겼다

그곳에 귀를 대면

누군가가 “누구세요?”라고 할 것 같다

그럼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나도 덮을 수 없을 때까지

무언가를 덮고 또 덮으며

골똘해야 하나, 무거워져야 하나


지하철을 탔던 사람이 출구로 나가고

지하철을 탈 사람이 출구로 들어온다

우리의 지향은 언제나 출구 쪽으로

나만 이곳에서, 없는 입구처럼 있다

네모보다는 조금 불안한 모양으로


2호선 열차가 또 발 밑으로 지나갈 때

순환을 믿게 하는 것들이 있다

그 노인이

그곳에

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나도 "지나갑시다." "지나갑시다." 한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잠깐 비켜주고

나는 무릎을 앞세워 걸어간다


IMGP7056.JPG


keyword
이전 28화들꽃 언약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