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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불시착 김택수 Dec 22. 2018

순심에게 가길 잘했다

     가난했던 청춘에게 걷기는 위안이었다. 특별한 계획 없이 그저 걷기가 나에게는 술이고, 담배고, 연애였다. 친구를 만나도 걸었고. 고민이 있어도 걸었다. 시간이 있으면 걸었고, 연애를 해도, 불만이 있어도, 긴장을 해도 걸었다. 걷다 보면 시간이 지났고, 목적지에 다다랐고, 고민을 잊었다. 돈이 궁했던 젊은 날 걷기는 경제적 관점에서는 최대의 효율이었다. 또 오래 걷다 보면 생각보다 생각하지 않는다. 무념이 걷게 된다. 그게 좋았다. 그땐 그랬다. 지금은 건강을 위해 걷는다는 사람이 많다. 허리에 스마트폰에 만보기를 확인하며 걷는다.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오늘 걸은 숫자를 확인하곤 한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이제 나는 걸으면 피곤하다. 말목부터 시작한 고통이 장딴지, 허리를 타고 올라온다. 이렇게 생긴 피로는 의욕을 삼킨다. 오늘 그랬다.





     조금 무리해서라도 순심이 있는 아라아트센터에 가려고 했다. 빠듯한 시간인 걸 알고 있었다. 당연히 걸음은 급해졌다. 마침 점심을 먹으러 간 순심을 대신해 매대에 앉아 포스터를 팔았다. 순심의 그림과 색감은 사람들을 붙잡았다. 프리다 칼로, 앤디 워홀, 콜미바이유어네임을 파는 동안에도 나의 눈은 자꾸만 시계를 향했다. 순심은 나를 배웅하러 종각역까지 나왔다. 우리는 잠깐 서브웨이에 들려  BLT를 급하게 먹었다. 나는 노동장으로 서둘러야 했고 순심은 장시간 비워둔 매대가 걱정이었을 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정하게 비싼 시간을 나누고 각자의 방향으로 돌아섰다. 

 






    역시 조금 늦었다. 얼마나 서둘러 걸었는지 발목이 시큰거렸다. 다행히 손님이 없었다. 카운터에 앉아서 영업의 의무를 접고, 할 일 스무 개를 접고, 하고 싶은 일 백열두 개를 접고, 턱을 괴고 커피를 마시는 것만이 나의 의지였다. 몇 시간이 지나고 오늘 유난히 손님이 없다. 카페 음악은 달달하고, 커피는 맛있다. 몸의 피로가 빠르게 회복되는 느낌이다. 서브웨이에서 순심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른다. 우습게도 순심의 얼굴은 첫 월급으로 막내동생에게 햄버거 사주는 누나 같았다. 피로가 조금씩 풀리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순심의 미소 때문이었다. 오늘의 피로는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순심에게 가길 잘했다.






illru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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