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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루 Oct 03. 2023

소년 그리고 소년

별처럼 유난히 눈이 반짝거립니다



식사가 끝난 후 하이가라(하이볼과 가라아게)를 주문한 중년의 남성 두 분이 술기운이 조금 차오르자 상대를 향한 입담이 짓궂어집니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로의 흑역사를 일부러 꺼내서 놀리고, 마치 그 시절 소년처럼 깔깔대며 유쾌하고 통쾌하게 얼얼한 반격을 주고받아요. 타임머신이라도 탄 걸까요. ‘이 녀석한테만은 절대 질 수 없지!’라는 의지가 선명해서 유치하고 때론 비열하기까지 합니다.


'이 모자란 녀석을 만나 주셔서 고맙게 생각합니다' 친구가 애인을 보여주겠다며 만난 자리에서 저는 대뜸 얄미운 말을 합니다. 이렇게 남자들은 티격태격 대듯이 서로를 낮추며 친분을 과시해요. 저 두 분을 보니 중년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나 봐요. 문득,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녀석이 떠올랐습니다. 나보다 날 더욱 잘 안다고 믿는. 내가 지우고 싶은 부끄러운 기억을 공격용 실탄처럼 장전을 하고 낱낱이 기억하고 있는 감자. 나는 고구마.


졸업식에 모인 친구들


다찌 한쪽의 여성 손님이 이 중년 남자들의 대화에 감정이 제대로 올라탄 모양입니다. 꾹 참고 있던 웃음이 끝내 터져버렸어요. 이 남성들은 이제 여성 관객까지 의식해 가며 수위를 넘나드는 거친 디스전을 펼쳐 나갑니다. 밖에서 칼바람 소리가 들려서 인지 따뜻한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는 이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 않아요. 어쩌면 이 정도의 소란스러움은 허용되는 게 이곳의 매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급기야. 한 분이 선을 넘습니다. “너 요즘에도 야밤이면 옥상에 올라가냐?” 예상치 못했다는 듯 깜짝 놀래서는 “변태 같은 놈, 너나 올라가겠지!” 우린 의심의 갸우뚱~ 야밤, 옥상, 변태. 묘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설전은 오늘로 끝나진 않을 것 같은 11월의 마지막 금요일.







두 소년이 저무는 석양을 마주하며 길게 뻗은 언덕길 정상에 서 있습니다. 저 한참 아래의 차들은 바퀴벌레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사람들은 마치 개미처럼 분주해 보여요. 둘 중 한 소년은 그 작은 움직임만으로 특정 인물을 식별해 내는 초능력이 있습니다. 두 소년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왔어, 뛰자!”


소년들은 뛰기 시작합니다. 모퉁이를 돌아 다시 언덕길로. 형들이 맨손 야구를 하던 공터와 아이들이 하나둘씩 집으로 불려 간 놀이터를 단숨에 지나갑니다. 그러면 야근을 끝낸 이모들이 퇴근을 서두르며 흩어지는 봉제공장이 있어요. 소년들의 그 건물의 목적지는 옥상입니다. 마침내 도착한 소년들은 차오르는 숨을 나눠 쉬며, 난간 위로 눈만 빼꼼히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잠시 후, 한 소녀가 골목으로 접어들어요.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큰 눈의 가진 소녀. 부산의 달동네에서는 보기 드물게 새하얀 피부를 가진. 그래서 막연히 서울말을 쓸 거라고 믿었던. 아침에는 빵과 우유만을 먹을 것 같던 소녀. 소년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목욕을 하고 자꾸만 어색한 서울말을 연습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소녀.


소녀가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갑니다. 1층, 2층, 3층 센서 등이 켜졌다 꺼지고. 이내 모습이 보이지 않아요. 초능력을 가진 소년과 그냥 소년은 그녀를 동경하지만 그저 그 마음뿐입니다. 그리고 내일도 다른 길을 선택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 그뿐입니다. 소녀가 사라진 후 소년들은 옥상에 그대로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소년들이 구릿빛 피부라 그런지 눈이 유난치 별처럼 반짝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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