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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Jun 15. 2020

아내와 함께 하기 위해서는.


연애시절에, 아내가 살아가는 곳과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은 시간이 각자 흐르는 다른 세상이었다. 당장이라도 퇴사를 할지, 아니면 최대한 버틸지, 퇴사를 한다면 언제 할지, 무엇으로 밥벌이를 할지, 주변은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 혹여 패배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을지, 부모님은 어떻게 설득할지, 어떤 계획을 보여드려야 나를 믿으실지.. 나의 세상은 이런 고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고민의 실타래가 뒤엉켜 꼬이면 아내의 세상으로 도망쳤다. 아내와 함께 있으면 엉킨 실타래 따위는 금방 잊혔다.


아내가 살고 있는 세상으로 간다는 건 나에겐 여행 같은 것이었다. 아내와 같이 있는 순간만큼은 나를 둘러싼 고민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는 무엇을 먹으면 맛있을지, 무얼 하며 놀면 재밌을지 정도의 고민만 하면 충분했다. 그런 고민들은 엉키거나 꼬일 만큼 복잡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행은 결국 내가 사는 곳으로 돌아와야 했다. 엉킨 실타래는 단지 잊고 있었을 뿐이지 없어진 건 아니었고, 스스로 풀어져있지도 않았다. 어차피 하나하나 내가 풀어야 했다.


직접적인 원인을 제거하지 않은 채 외면하고 도망 다니는 건 한계가 있었다. 회사에 있을 때는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고, 아내를 만날 때는 조금 더 버티고 싶었다. 나의 세상은 포기에 있었고 아내의 세상은 버팀에 있었다. 둘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고, 그럴 성질의 것도 아니었다. 포기와 버팀 사이에서 방황하기 시작했다.


연애는 서로를 공유해야 했다. 연애는 내 민낯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서 쌓았던 성벽의 잠긴 문을 이따금씩 두드렸다. 다른 사람들을, 심지어 부모님까지도, 성안에 들여놓지 않는 건 수월했는데 아내를 방어하는 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당신의 머릿속에는 뭐가 있어?’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가보고 싶은 여행지를 묻는 것과는 달랐다. 이런 질문들의 답은 성 밖에 있었지만, 내 머릿속을 보여주려면 굳게 닫아놓았던 성안으로 아내를 들여야 했다.


아내에게 퇴사 고민을 선뜻 말하기는 어려웠다. 퇴사 이후의 내 계획에 아내의 자리는 없었다. 번듯한 직장인이라는 배경 없이 아내에게 당당할 자신이 없었다. 아내와 함께 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버텨내야 했다. 버텨내지 못하고 포기한다는 건, 회사뿐만 아니라 아내 역시 떠나보낸다는 걸 의미했다. 아내는 이따금씩 결혼 이후의 모습에 대해 얘기했지만, 난 그럴 때마다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아내는 둘의 미래를 바라보려 했지만, 난 현재만을 이야기했다.


이전에는 없었던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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