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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현 May 03. 2023

어디나 사람은 다 똑같아.

   전철문 위에는 닫힘을 알리는 빨간등이 점멸하는데, 문 너머 50대로 보이는 금발 아주머니가 빠르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전철문은 닫히기 시작하고, 아주머니는 아직 손이 닿을 만큼 가까이 오지 못했고, 아쉽지만 아주머니 다음 차 타셔야겠네요, 하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고, 도와달라는 듯한 애절한 눈빛을 느꼈다. 외면할 것인가, 도울 것인가, 판단이 채 서기도 전에 나도 모르게 닫히는 문 사이로 발이 내밀어졌고, 내 발을 감각한 전철문이 다시 열렸다. 가까스로 전철에 올라타 숨을 한번 몰아 쉰 아주머니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당케 쉔 Danke schön. 나도 아주머니의 눈을 맞추며 이 정도는 별일 아니라는 듯 응한다. 비테 Bitte.


   오후 시간, 오스트리아의 전철 안은 한갓지면서도 소란하다. 10대의 반항기를 얼굴로 표현하려는 듯 검은색 눈화장을 진하게 한 여자 셋이 서로에게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발랄한 웃음소리를 내지른다. 뭐가 저렇게 재밌을까. 하기야 뭐든 재밌을 나이긴 하지. 그 옆에 곱슬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는 남자와 투명한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여자는 서로 마주한 채 다정하다. 말을 나누지 않으면서도 남자는 연신 웃고 있고, 여자는 남자의 올라간 입꼬리를 곱게 매만진다. 뭐가 저렇게 좋을까. 하기야 뭐든 좋을 때이긴 하지.


   아내는 옆에서 노래 하나를 계속 흥얼거린다. 나만 알아차릴 수 있는 아주 작은 율동(미세하게 몸을 좌우로 두 박자씩 흔든다.)과 함께다. 공공장소에서 이러지 말자, 라는 의미를 담은 눈빛이 티 나도록 눈동자를 가로젓고, 전철 안에서 뜬금없이 흥 돋은 이 사람은 내가 모르는 사람입니다, 라고 주위에 알리듯 한 걸음 성큼 떨어진다. 아내는 왜에? 내가 부끄러워? 하고 반색하며 묻고는 벌어진 간격을 다시 좁힌다. 그러고는 당신과 함께 있으니 좋아서 그런거야, 라고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하지만, 그것보다는 지금 배가 든든하게 불러서라는 걸, 그래서 기분이 좋기 때문이라는 걸 나는 안다. 아까 숙소에서 만들어 준 바질페스토 파스타가 이전에 했던 것보다 맛있긴 했지.


   곳곳에서 제각각의 사연이 담긴 웃음기 밴 표정들이 오가는 오후 시간, 오스트리아의 전철 안은 조용하면서도 시끌하다.




   어릴 적, 인간만큼의 지능을 가진 다른 동물은 왜 없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그러니까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개나 고양이, 혹은 돼지나 소처럼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동물들이 아닌, 말도 통하고 맘이 틀어져 싸우기도 하고, 고민도 털어놓을 수 있는 동물들은 왜 없을까 하는 생각. 그게 어렵다면 인간보다 지능이 아주 조금만 낮아서, 고민 상담을 하기에는 무리지만 함께 숨바꼭질 정도는 할 수 있는 동물들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확률분포를 따져보면 인간보다 지능이 조금만 떨어지는 동물들은 반드시 있어야 하지 않나. 왜 가장 지능이 뛰어나다는 동물조차도 인간의 지능과는 비교도 못 할 차이가 있을까.


   글을 깨치고 책을 읽으면서 접한 의인화된 동물들을 보면서, 좀 더 나이가 들어서는 자율학습 시간에 문제집 대신 판타지 소설을 꺼내 들고 엘프나 오크, 드워프를 읽으면서 왜 이런 종들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학교 모의고사에서는 묻지도 않을 문제의 답을 찾곤 했다.


   좀 더 후에 알게 된 사실인데, 네안데르탈인은 현생 인류와 동시대를 살았던 (대략 20만 년 전부터 4만 년 전까지) 종이라 한다. 현재의 유럽지역에서 주로 살았고, 현생 인류와 마찬가지로 도구와 불을 사용했고, 그들의 언어, 장례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 어느 지역에서는 네안데르탈인이 그린 동굴 벽화도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분명 인간만큼의 지능을 가진 다른 종이 있었다는 말이다.


   네안데르탈인이 현재까지 살아남을 수는 없었을까. 인간과 네안데르탈인의 관계는 어땠을까. 수렵과 채집을 하는 지역이 겹치는 경쟁자였고, 인간과 비슷한 무기를 들고 인간처럼 무리 지어 사냥하는, 하지만 생김새가 다른 인간이 아닌 종. 그들이 사냥감을 선점한 탓에 며칠을 굶어야 한다면, 그래서 그들이 생존의 걸림돌이라 느껴졌다면, 생존을 위해 그들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그러다 그들의 공격으로 불타버린 한 마을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 그들에게는 바로 내가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었음을 비로소 깨닫지 않았을까.

 

   나와 다른 종이 나와 같은 생각을 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은 곧 두려움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 인간만큼의 지능을 가진 동물이 없는 이유는 동시대에 살던 네안데르탈인을 몰아내 결국 멸종시킨, 바로 호모 사피엔스 때문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전철 안, 헤드셋을 머리에 쓰고 음악을 듣고 있는, 비포 선라이즈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처럼 생긴 기럭지가 긴 남자를 보면서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도 나처럼 헤드셋을 쓰고 음악을 듣는구나. 그들도 나처럼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두 개의 귀가 있구나.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말하는구나. 지구 반대편에서 나와는 전혀 겹치지 않는 삶을 사는 생명체의 팔이 나처럼 두 개인 것도, 그 팔 끝에 달린 손가락이 나처럼 다섯 개인 것도 새삼 신기하다. 나와 닮은 그 생명체가 지금 같은 탈 것에 실려 같은 속도로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것도.


   내가 추위를 느껴 내복을 껴 입으면 그들도 나와 같아서 추위를 방어할 두툼한 패딩을 입고, 슈니첼을 먹는데 맥주가 없으면 안 되지, 하며 잔을 부딪히면 그들도 나와 같아서 타펠슈피츠에는 역시 와인이지, 하며 잔을 비운다. 오래 걷다 보면 똑같이 다리가 아프고, 밥때가 되면 똑같이 배가 고파지고, 주린 배가 채워지고 결들인 술 한잔이 들어가면 똑같이 흥이 돋는, 나와 같은 그들을 보면 내가 지금 낯선 곳을 여행하고 있다는 두려움을 잊게 만든다. 긴장으로 팽팽하던 신경이 느슨해진다.


   몇 개의 국경을 넘고, 낯선 도시들을 돌아다니고, 익숙하지 않은 향의 밥을 먹고, 다른 시차에 잠을 잔다. 지구 반대편으로 100일이 넘는 긴 여행을 떠날 거라는 말을 들은 친한 선배는 낯선 곳이 위험하지는 않겠냐며 걱정을 하다가도 이내 아니다, 사람 사는 데는 뭐 어디나 똑같겠지, 하며 안전한 여행이 되기를 빌어 주었다. 그 말에 그렇겠지, 다 사람 사는 데니까 똑같겠지, 하고 웃어넘겼는데 지금이라면 조금 다른 답변을 하지 않았을까. 어디나 사람은 다 똑같아, 라고. 별것 아닌 호의에 감사함을 전하고, 10대의 젊음이 우정을 나누고, 젊은 연인이 사랑을 보듬을 때면 저절로 입꼬리가 환하게 올라가는, 두 팔에 달린 손가락이 똑같이 다섯 개인 다 같은 호모 사피엔스니까.





이번 매거진은 idle​​ 님과 함께 꾸려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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