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현 Dec 08. 2020

탄수화물은 적이야. 파니니 샌드위치.

커피 캡슐이 떨어져 간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커피를 내리는 일이고, 그때마다 아내와 나 각각 캡슐 두 개씩, 하루 네 개의 캡슐을 없앤다. 은퇴를 하기 전에는 회사를 가지 않는 주말에만 없앴는데, 이제 매일 집에서 커피를 마시다 보니 사놓은 캡슐이 금방 동이 난다.

‘캡슐 사야겠다. 마트 갈 때 백화점도 들려야겠어.’

백화점에 들려야 할 일이 생기면, 집에서 가까운 마트 대신, 조금 더 떨어진 마트로 간다. 조금 더 먼 마트 바로 옆에 백화점이 나란히 있다. 마트 주차장에 차를 두고, 지하통로로 연결된 백화점으로 간다. 캡슐을 파는 곳은 백화점 1층이지만, 지하통로를 거치다 보니 늘 지하의 식품코너를 지나친다.


식품코너는 언제나 갓 구운 빵 냄새가 진하게 풍긴다. 간만의 백화점 구경에 들떴던 아내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진다. 재잘대던 소리도 그친다. 판매대에 진열되어 있는 모든 빵 하나하나에 시선을 뺏긴다.

‘먹고 싶으면 사.’

대답이 느리다. 고민 중임이 분명하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아내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야. 세상엔 참아야 하는 일도 있어.’

빵 냄새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하지만, 슬쩍 본 아내의 얼굴은 행복한 표정이 아니다.


아내는 빵을 좋아한다. 지방 도시를 대표하는 빵집의 이름을 모두 꿰고 있다. 여행이라도 가면, 유명 관광지를 들르듯 그 지역의 빵집을 찾는다. 양손으로 집게와 쟁반을 들고, 값 비싼 물건 고르듯, 빵 하나하나 신중을 기해 꼼꼼히 살핀다. 하지만 집게로 들어 올려 값을 치르는 건 고작 한두 개뿐이다.

‘맛만 보려고.’

‘언제 또 여기 온다고. 온 김에 좀 더 사지?’

역시 대답이 느리다. 또다시 고민 중이다. 진열된 빵에 한참 눈길을 두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안돼. 탄수화물은 적이야.’




연애시절, 아내와 약속이 없던 주말, 집에만 있기 답답해 책이라도 볼까 하고 동네의 카페를 찾았다. 살짝 허기가 느껴져 샌드위치도 커피와 함께 주문했다. 파니니 샌드위치라는 이름이었다. 잠시 후, 심플한 접시에 나온 파니니 샌드위치는 식빵에 치즈, 슬라이스 햄이 전부였다. 식빵에는 그릴 자국이 선명했다. 그릴에 눌려 구워진 바삭한 빵의 식감. 속 안의 치즈는 녹아서 빵과 어울렸다.


파니니 그릴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토스터기는 안돼. 치즈를 녹일 수 없어.’

파니니 그릴이어야 했다. 10년 전에는 한국에서 가정용 파니니 그릴을 살 수 없었다. 미국 사이트에서 직구로 구입했다. 미국 가전은 110 볼트여서 변압기도 따로 사야 했다. 샌드위치를 만들기 까지는, 그릴이 미국에서 한국으로 바다를 건너오는데 필요한 2주를 기다려야 했다.


파니니 그릴이 집으로 배송된 날, 아내를 집으로 초대했다.

‘진짜 맛있는 샌드위치 만들어 줄게.’

궁극의 레시피를 가지고 있는 듯한 자신감을 보였다. 파니니 그릴을 손에 넣었으니 무서울 게 없었다. 도구만 좋으면 초짜도 장인이 된다.

‘오. 맛있네? 이거 진짜 맛있다!’

후훗. 그럴 거다. 최고의 도구를 썼거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 날, 아내가 그토록 맛있게 샌드위치를 먹었던 이유가, 파니니 그릴로 만든 샌드위치여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든다. 이유는 그저 단순히 빵이어서가 아니었을까.




냉장고엔 늘 샌드위치를 만들 재료가 있다. 유통기한이 길지 않아서 냉장고에 오래 둘 수가 없다. 별다른 말 없이 재료를 준비한다. 샌드위치를 만들 때 아내의 동의는 굳이 필요 없다. 재료를 본 아내의 표정은 이미 밝아져 있다.


재료는 식빵, 슬라이스 치즈, 햄, 달걀, 양상추, 곁들일 커피.

아침에 눈 뜨자마자 캡슐커피를 마셨기 때문에 샌드위치에 곁들일 커피는 믹스커피를 택한다. 은근히 값이 나가는 캡슐커피를 하루에 두 번 먹기엔 마음이 좀 불편하다. 양상추를 신선하게 오래 보관하려면 진공팩을 쓰라고 하던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아내가 있어서 샌드위치의 재료는 빨리 소진된다.


삭빵 위에 치즈와 햄을 얹고 그릴 위로. 햄이 가운데 있지 않아서 불편하실 분들이 은근히 있다. 분명 있다. 치즈가 사진에 나오지 않아서 그랬다. 사진을 찍고 가운데로 옮겼다.

10년 전에 직구로 구입해 잘 쓰던 파니니 그릴은 1년 전쯤 수명을 다했다. 마음에 들어하던 조리도구 중 하나였는데 안타깝다. 새로 산 파니니 그릴은 예전 것 보다 그릴 간격이 촘촘하지가 않다. 식빵의 새겨지는 그릴 자국이 이전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필살기가 없어진 기분이다. 어쩔 수 없다. 이렇게 구워진 샌드위치가 초기 버전이다. 아. 정말 초기 버전은 식빵의 테두리를 제거했었다. 부드러운 부분만 남은 식빵을 그릴이 위아래로 누르면, 얇아져서 맛이 더 좋다. 하지만 테두리를 잘라내 버리는 건 못할 짓이다.    


달걀 프라이를 올리고, 양상추도 올리고.

호주에서 캠핑카로 여행을 하면서 달걀 프라이가 추가됐다. 많이 걸을 때라 금방 배가 고팠다. 식빵에 치즈, 햄으로는 부족했다. 달걀 프라이를 넣어야 했다. 양상추는 아내가 원했다. 야채도 함께 먹어야 빵을 먹는 죄책감이 좀 줄어든단다. 양상추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높이 쌓는다. 여기까지가 지금의 버전이다. 식빵과 치즈, 햄, 달걀 프라이, 최대한 높이 쌓은 양상추.


완성. 접시 한쪽에 양상추를 더 얹는다.

아내는 늘 나보다 적게 먹으려고 한다. 공기에 밥을 담아 내놓으면 늘 한 숟가락씩 내 쪽으로 넘긴다.

‘당신은 남자잖아.’

두 가지의 예외가 있다. 고기나 빵을 먹을 때가 그렇다. 그 두 가지는 늘 나와 같은 양을 먹는다. 가끔 집에서 삼겹살을 구울 때, 잘 익은 삼겹살을 개수에 맞춰 각자의 앞접시에 놓는다. 먹다가 딱 떨어지지 않고 마지막 한 점이 애매하게 남으면, 한 점을 반으로 자르기 위해 가위를 가지러 간다. 아내는 가위를 가지러 가는 나를 굳이 잡지 않는다.


샌드위치도 각자 하나씩이다. 달걀 프라이와 양상추가 추가되어 양이 꽤 되는데도 남김이 없다. 샌드위치를 먹고 나면, 아내는 늘 어김없이 이방 저방을 정신없이 돌아다닌다. 빵을 양껏 먹었다는 죄책감을 없애기 위한 나름의 운동이다.


이전 02화 엄마가 자주 해 주셨던 이유. 간장계란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