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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윤 Aug 27. 2020

#8. 임산부 배려석이지, 의무석은 아니잖아요?

임신한 게 유세는 아니지만.

오늘은 누군가에겐 다소 불편할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작년 초, 산부인과에서 임신을 확인하고  보건소로 찾아가니 엽산과 영양제, 그리고 임산부 배지를 주었다.
이전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가방에 걸 수 있는 분홍색의 동그란 배지였다.

임신확인서를 보건소에 내면 영양제와 임산부 뱃지 등을 준다. 시마다 지급 항목이 다를 수 있음.


처음엔 배지를 가방에 달고 다니기에 조금 부끄러운 느낌이 들어 가방 속에만 넣어두고 다녔었는데 점점 배지의 필요성을 인지하게 되었다.

임신 초기에는 배가 부르지 않아 임산부인걸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불편했던 일들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운동을 좋아해서 체력 하나는 자신이 있었는데, 임신을 하게 된 순간 입덧이라는 녀석이 찾아오면서 체력이 바닥을 치게 되었다. 그냥 천천히 걷다가도 숨이 차고, 하루 종일 배 위에 타있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리는 등 내 몸이 결코 내 몸 같지 않았다.

하루는 불가피하게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는데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워 빈자리가 나 얼른 앉았다. 그런데 잠시 후 연세가 지긋하신 할아버지 한분께서 젊은 게 자리도 양보하지 않는다며 내게 불같이 화를 내셨다. 임산부라고 말씀드렸는데, 배도 안 나왔는데 무슨 임산부냐고 쩌렁쩌렁 큰소리로 화를 내시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어 너무 창피하고 수치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그 이후에도 출, 퇴근시간에 걸려 일명 '지옥철'을 타게 되었을 때도 내가 임산부인걸 사람들이 모르니 배를 치고 가거나 밀쳐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도 다치지 않으려고 몸을 웅크리고 긴장하니 배가 심하게 뭉쳤다. 자리 양보는 고사하고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 이후부터 배지를 달고 다니게 되었다.

사실 나도 생각해보면 임신 전, 고단한 출퇴근길 편하게 가고 싶은데 내 앞에 임산부가 서면 양보를 하면서도 조금 귀찮기는 했던 것 같다.

'아, 나도 피곤한데 왜 하필 내 앞에..'

하지만 나도 그 상황이 되어보니, 그런 생각을 가진 것조차 미안할 정도로 몸이 너무나 힘들었다.
어느 날은 자리가 만석인 지하철을 탔는데, 서서 가는 게 너무 힘들어 중간에 내려 잠깐 쉬고 다시 탄 적도 있다.




임신 35주가 지나면 '정말 이러다 터지는 거 아닐까?'싶을 정도로 배가 많이 불러오기 때문에 서있는 것도 힘들 때가 있다.

그래서 나도 웬만하면 외출을 하지 않으려 하는데, 산부인과 정기검진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지하철을 타게 된 날이었다. 자리는 만석이었고, 지하철에 몸을 싣자마자 남산만큼 불러온 내 배를 사람들이 흘끗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사실 임산부 배지를 하고 사람들 앞에 서는 임산부의 입장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자리를 비켜달라는 무언의 압박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럴 땐 보통 지하철 문 앞에 서있곤 하는데, 그날따라 배가 유독 뭉쳐서 서서 가는 것이  힘들었다. 그러다 임산부 배려석에 임산부가 아닌 한 청년이 앉아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금방 내리려나 싶어 그 앞에 서있는데 30분 이상 가야 하다 보니 점점 다리가 저리고 배가 뭉쳐왔다.
참아보려 했는데, 막달이라 몸에 너무 무리가 되어 임신 기간 중 처음으로 앞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저기.."

그 청년은 휴대폰 게임을 하다 말없이 나를 슬쩍 올려보았다.

"정말 죄송한데 제가 임산부라 몸이 힘들어서, 여기 임산부 배려석에 좀 앉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내 예상과는 달리 돌아온 대답은 냉정했다.

"여기가 임산부 배려석이지, 임산부 의무석은 아니잖아요. 똑같은 돈 내고 타는데 제가 의무적으로 양보해야 해요?"

예상치 못한 날선 반응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집중되는 것 같아 너무 창피했다.

물론 임신 기간 중 무거운 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흔쾌히 먼저 양보해준 분도 계시고, 본인도 임산부임에도 내 배가 더 불러와 힘들 것 같다며 앉으라고 해주신 분도 계셨다.

'임산부 의무석이 아니다.'는 그 청년의 말처럼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해달라고 강요할 순 없다. 물론 임산부뿐만 아니라, 다른 누군가도 몸이 힘들고 지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예전의 나도 이런 경우, 사실 귀찮았던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직접 겪어보니 임산부도 사회적 약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말이지 몸이 내 뜻처럼 되지 않기 때문이다. 난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잘 못 걸고 남에게 부탁도 잘 못하는 성격인데, 그런 내가 자리를 양보해달라고 했던 것을 보면 임신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해도 혹자는 '그렇게 몸이 힘든데 집에 있지, 밖에 왜 나와?', '더 힘든 사람도 많은데 임신한게 유세야?'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다.

돌이켜보면 임신 기간 중 가장 힘들었던 건 무거운 몸도, 항상 누군가가 앉아있는 임산부 배려석도 아닌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과 임산부를 향한 은근한 조롱이었다.

배도 나오지 않았는데 무슨 임산부냐며 내게 불같이 화를 내던 할아버지도, 무슨 이유인지 내 배를 보며 '임신했다.'라며 낄낄대던 고등학생 무리도, 임산부 의무석도 아닌데 꼭 자리를 양보해야 하냐고 묻던 청년도 아이를 출산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그때의 상황이 선명하게 생각난다.

그래서 나는 또 다른 임산부에게 그런 상처를 주지 말아야지 생각한다. 내 앞에 한 임산부가 섰을 때, 조그맣게 한숨을 쉬며 자리를 양보하던 내 모습이 누군가에겐 커다란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나는 그나마 임신 후 휴직하고 집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지만, 내 지인들만 해도 출산 일주일 전까지 강남으로 1시간이 넘는 거리를 출퇴근했던 임산부들도 있었다.


임산부라서 거창한 대접을 받는 사회를 원하진 않는다. 다만, '임신한 게 유세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조롱당하지 않는 사회, 내 마음에서 우러나 자연스럽게 배려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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