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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마아빠 Aug 22. 2021

전 섹스 없이도 살 수 있습니다. 믿어 주세요.

임신 제5주

“아빠 들어오세요.”

상담실에 딸린 초음파실에서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태껏 한 번도 "아빠"라고 불린 적이 없기에, 그것이 날 찾는 소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잠자코 상담실 의자에 앉아 있는데, 몇 초 후 “sweetheart, come in!”이라고 외치는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서야 “아 맞다, 나 아빠 됐지”라는 생각에 부랴부랴 초음파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흰색 가운 차림의 아내가 다리를 쩍 벌리고 뒤로 젖혀진 의자에 누워 있었다. 다리를 벌리고 있는 아내, 그 사이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의사와 간호사, 여러모로 낯선 광경이었다.


내 눈은 자연스레 아내의 시선을 따라 의자 발치에 있는 모니터 두 대로 옮겨갔다. 모니터 화면엔 각각 조금씩 다른(솔직히 내 눈엔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는) 흑백 초음파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흐릿흐릿한 화면 정중앙에 강낭콩 모양의 작고 검은 물체가 보란듯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2주 뒤에 오시면 그땐 뇌도 있고 심장박동도 보실 수 있으실 거예요. 축하드려요.”

뭐가 뭔지 모르겠는 와중에 일단 의사 선생님의 축하는 받았다. 내가 한 거라고는 신나게 섹스한 것밖에 없는데 축하를 받으니 굉장히 머쓱했다. 다시 초음파 사진으로 눈을 가져갔다. 와… 신기하다. 저게 내 아이라고? 저 콩알만 한 세포 뭉치가 장차 내 희로애락을 좌지우지할 인간으로 자란다고 생각하니 감격스럽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했다. 줄 두 개로만 확인했던 임신 여부를 사진으로 확인하니 그제서야 아주 조금 실감이 났다.

다시 상담실로 돌아와 의사 선생님의 간단한 설명과 주의사항을 들었다. 1분기가 끝날 때까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목욕도 하면 안 되고, 커피도 마시면 안 되고,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좌우지간 안 되는 게 많았다. 그 와중에 가장 청천벽력 같았던 말은 당연코 섹스금지령이었다.

“11주까지 두 분 관계하시면 안 돼요.”

순간 마스크 위로 눈이 똥그랗게 커지고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의사 선생님은 진심으로 당황한 내 표정에 피식하시더니 계속해서 주의사항을 읽어내려가셨다. 의사 선생님 말씀이 끝나자마자 얼른 이 중차대한 사실을 아내에게 알려야 한다는 일념 아래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우리 11주까지 하면 안 된대!”부터 내뱉었다. 아내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이 9살 연하남의 반응이 재밌는지 쿡쿡대며 날 쳐다봤다.


그날 밤 잠자리에 나란히 누워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아내가 말했다.

“너 오늘 엄청 귀여웠어 ㅋㅋㅋ 어쩜 그리 표정을 못 숨길까 ㅋㅋㅋ”

“내가? 나 표정관리 엄청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잘하기는 개뿔. 아주 눈알이 튀어나오려고 하더만 ㅋㅋㅋ”

아내 말을 듣고 그때를 다시 상상해보니 웃겨서 한참 깔깔댔다. 그때 진심으로 놀라긴 했었나 보다. 물론 한 달 반 동안 섹스 없이 살 수 있다. 내가 무슨 섹스 중독자도 아니고 살고도 남는다. 단지 너무나도 뜻밖의 소식이라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었을 뿐이다. 의사 선생님은 그때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그날 집에 가서 남편에게 “여보, 오늘 또 우리나라에 준비 안 된 부모 한 명이 늘었어”라고 했을까.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싶다. 선생님, 안심하셔도 됩니다. 저 섹스에 눈멀어 사리 분별 못 하는 애송이는 아니니 걱정하지 마셔요.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습니다. 믿어주세요! 어찌 됐든 우리의 첫 번째 산부인과 방문은 섹스금지령에 보인 내 격양된 반응으로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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