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우리 학교에서는 학예발표회가 열린다.
방과 후 교육 같은 여러 특별활동을 통해 갈고닦은 각자의 실력을 선생님들과 어머니 앞에서 뽐내는 무대이다.
작지 않은 규모의 행사라 교사들은 여전히 분주한 모습으로 뛰어다니지만 제자들의 커 가는 모습들은 언제나 선생님들에겐 가장 큰 선물이기에 흐뭇한 웃음과 짠한 감동이 어우러지는 기다림의 순간이기도 하다.
피아노, 플롯, 트럼펫 같은 서양악기 연주도 있고 가야금 장구 태평소 같은 국악 연주도 있었다.
아이돌의 노래도 부르고 민요나 성악을 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프로그램을 살펴보던 중 조금은 낯선 제목의 순서가 눈에 띄었다.
노래와 악기 연주가 대부분인 시각장애 학교 발표회에서 연극이라는 익숙지 않은 무대가 예정되어있었다.
동작이나 표정 그리고 이동이 어려운 시각장애 아이들의 연극이라서 놀란 것만은 아니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무대의 동선을 반복적으로 외우고 익히면서 연극발표를 하는 것은 맹학교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긴 했다.
자립생활의 정도가 우수하고 학습능력이 뛰어난 아이들은 연극 아니라 더한 것도 만들어 내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번 출연진은 조금은 특별한 아이들이었다.
시각장애 특수학교이니 앞을 못 보는 것은 기본이고 그에 더해 걸음을 걷기 힘든 친구, 학습이 어려운 친구, 목소리 대화가 안 되는 친구까지 있었다.
나 자신도 특수교사이지만 어떤 모양의 작품이 나올지 참으로 궁금해지는 시도였다.
연극이 시작되고 우리 모두는 눈을 감아야 했다.
소리극이었다.
몸동작이 어려운 학생들이었지만 관객이 눈을 감는 순간 그것은 우리의 상상 안에 화려한 동작들로 다시 태어났다.
암기가 어려운 친구들은 마이크 앞에서 편안히 점자를 읽어내면 되었고 그마저도 어려움을 느끼는 친구들은 해설을 나누어서 하고 있었다.
장면마다 바뀌는 해설의 목소리는 오히려 장면 전환을 상상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목소리 흉내 잘 내는 아이들의 맛깔나는 연기는 덤이었다.
따뜻함이 물씬 느껴지는 연출이었지만 그래도 거기까지는 장애 아이들을 수년간 가르쳐 본 경험으로 아주 새로운 시도라고 까지는 생각되지 않았다.
'백 한 번째 손님'이라는 훈훈한 이야기가 끝나고 출연진을 소개하는 마지막 맨트를 들으며 아빠미소를 짓고 있을 때 난 잠시간 멍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 누구누구 소년: 누구누구 해설: 누구와 누구와 누구..."으로 이어지는 소개의 끝머리에 "음향: 누구누구"라고 마지막 소개가 이어졌다.
그랬다.
내가 잠시 잊고 있던 기 녀석이 음향효과를 맡고 있었던 것이다.
난 그 아이가 노래를 좋아하고 컴퓨터를 잘 다룬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설픈 연기들마저도 맛깔나게 만들어 주던 그 음향들을 들으면서도 그 녀석을 떠올리지 못했다.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또 하나의 장애에 갇혀서 나 또한 연극 안에서 그 아이의 역할을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맹학교에서 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편함을 넘어서서 불가능인 적이 너무도 많다.
연극 게다가 소리극에서 그런 그 녀석이 맡을 수 있는 역할은 나로서는 그래서 더 찾기가 힘들었다.
그렇지만 그 아이는 연극의 완성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훌륭한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학예발표회에는 옆동네 유치학교 3살 꼬마친구들도 있었고 대학 입학을 앞둔 고3 형님도 있었다.
처음 배운 피아노 곡을 힘겹게 느리게 완성해 가는 아이도 있었고 모짜르트나 쇼팽을 화려하게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도 있었다.
아이들은 각자의 속도에 맞추어 성장하고 있었고 각자가 목표하고 그리는 꿈의 크기만큼 자라고 있었다.
감동의 크기는 발표의 완성도와는 큰 관계가 없었고 그것들은 교사에게 학부모에게 모든 관객들에게 크리스마스의 큰 선물이 되었다.
난 장애를 가졌지만 사람은 누구에게나 각자의 역할과 자리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졸업하는 제자들을 보면 늘 걱정과 불안한 마음을 가진다.
"잘 할 수 있을까? 상처 받지 않을까?"
오늘 발표회를 보면서 난 내 마음이 다 큰 아들 차조심하라고 걱정하는 어떤 어르신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에겐 누구나 자리가 있고 역할이 있다.
크리스마스의 선물처럼 그것은 크기도 모양도 다양하겠지만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것일 수도 있고 대체 불가능한 최고의 감동으로 전해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