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리학과 신교수의 식탁 일기
지난주 일요일 오후, 방배동에 한 중식당에 다녀왔습니다. 전국에서 탕수육이 가장 맛있다고 하며 미디어의 극찬을 받는 곳입니다. 탕수육이 다 그렇겠거니 하고 별 기대는 안 했지만, 한점 접시에 올리고 먹어보니 참 맛있습니다. 튀김옷이 엄청 두껍고 눅진합니다.
어떤 느낌이냐면 크리스피 크림 도넛 안에 돼지고기가 숨어 있는 듯합니다.
제 추측으로는 사장님 어린 시절 탕수육 반죽과 도넛 반죽이 뒤바뀌어 실수로 튀겼는데, "오호! 이거 맛있는데!" 라며 탄생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순전히 제 추측이니 완전히 믿지는 말아주시길...!^^
'맛있고 기름진 도넛을 수육과 함께 식초에 찍어먹는 맛'이라고 표현하면 이해가 되시나요?
3개 이상 먹으면 도넛 3개 먹는 느낌입니다...;;;
맛있습니다.
탕수육의 명칭은 한자로 당초육(糖醋肉)이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달고 신 돼지고기'라는 뜻입니다. 중국 발음으로는 '탕추러우'라고 발음합니다. 탕추러우가 한국말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탕수육으로 불렸습니다.
찹쌀 탕수육인 궈바오러우는 한자로 과포육(锅包肉)이라고 합니다. 가마 안에 포를 싼 돼지고기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중국 남부 광동지역과 대만에서는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세계 전역에서 많이 팔리는 파인애플이 꼭 들어가야 하는 '구라오러우' 고로육(古老肉)이라는 탕수육과 비슷한 메뉴가 인기가 많습니다.
탕수육의 시초는 아편전쟁 이후 영국인들을 위한 메뉴로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고, 원래 동북 음식이었던 꿔바로우가 하얼빈에 방문한 러시아인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등의 가설은 많지만 확실한 유래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어쨌든 중국의 탕수육도 설탕이 대중화되기 이전까지는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보는 게 정설로 통합니다.
우리나라의 탕수육은 우리나라의 개항 이후 중국 특히 우리나라 경성과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지역인 산둥반도의 중국인들이 인천으로 대거 유입되면서 중국음식이 전례 되는 과정에서 탕수육이 유입되었다고 전해 집니다.
1937년 9월 19일 동아일보 신문기사에 탕수육이 가락국수, 잡채, 호떡 등과 함께 인기 있는 요리라고 기사까지 나올 정도로 탕수육은 대한민국의 외식문화에 영향을 끼칩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탕수육은 설탕과 식초가 들어간 동북지방에서 유래되었다는 당추(糖醋)소스에 북경요리로 대표되는 꿔바로우, 파인애플이 들어간 구라오러우등 여러 가지 버전의 탕수육 형태로 팔리는 음식들의 장점을 모은듯합니다.
탕수육은 물론 우리나라만이 아닌 전 세계에서 인기 있는 중국음식입니다.
말 그대로 달고(糖, 당) 신(醋, 초) 돼지고기는 해외 중식당에도 'sweet & sour pork'로 불리는 우리의 탕수육과는 조금은 다르지만 '탕수육(糖醋肉)'을 판매합니다. 미국과 유럽의 중식당에서도 탕수육은 인기가 높습니다.
탕수육 먹고 난 뒤에는 늘 짜장면이 따라옵니다.
짜장면의 어원은 찰장면(炸醬麵) '튀긴 장면'입니다. 한자 炸는 터질 작과 튀길 찰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짜장면의 경우 작장면이 아닌 찰장면의 옳은 발음입니다.
말 그대로 춘장을 튀기듯이 볶아서 만든 면요리로 '자지앙미엔'이라고 발음합니다. 광동요리에 속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짜장면과는 상당히 다른 비주얼과 맛입니다.
짜장면은 한국식으로 변형된 중국음식의 대표적인 예에 속합니다.
우리나라의 개항 이후, 인천 차이나타운이 처음 생길 때 중국인들을 위한 면요리 메뉴로 공화춘부터 시작된 메뉴라는 게 현재로는 정설입니다.
1954년 미국의 잉여농산물을 개발도상국에 원조할 수 있도록 명문화한 '미공법 480조(Public Law 480)' 제정됩니다. 6.25 전후, 미국으로 받은 밀가루가 우리나라의 식탁을 책임집니다. 라면을 선두로 수많은 면요리, 국수, 빵과 과자 등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막걸리까지 밀가루로 만들어졌습니다.
중국의 춘장은 콩으로 만들지만 이때부터 우리의 춘장은 밀가루로 생산하게 됩니다. 짜장면이 중국과 다르게 우리나라풍하게 바뀐 이유를 추측하면 콩으로 만든 춘장이 바뀌고, 중국 찰 장면의 짠맛보다는 우리네 입맛에 맞는 단맛이 강조되면서 오늘날 우리의 짜장면이 탄생합니다. 짜장면은 이제 우리나라 외식시장의 최고 강자로 배달의 민족 최고의 메뉴이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배달의 역사와 같이하는 메뉴이기도 합니다.
1990년대 중반, 중국인 관광객들이 한국에 관광을 오기 시작한 초기입니다. 뉴스에 중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먹을 게 없어 관광이 힘들다는 뉴스가 나올 때 '서울에 한집 건너 한집이 중국집일 텐데, 먹을게 왜 없다는 거지?' 하며 의아해한 적이 있었는데 이후, 회사일로 중국을 방문하고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중국집에서 먹던 음식과 실제 중국음식은 너무나 다른 향신료와 조미료, 조리기구와 조리방식까지 다른 식문화였습니다. 중국음식이 처음 개항 후 조선에 올 때는 비슷했겠지만, 이후 10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화 된 정도가 아닌 한국음식이 되었구나!'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어린 시절 제일 친한 친구가 화교(華僑)여서 친구 아버님이 중국집을 하셨습니다. 방과 후 집에 가기 전 중국집에 들르면 친구 아버님이 짜장면과 탕수육을 가득해주시던 기억이 납니다. 화교였던 친구 집의 비밀창고 같은 다락방에 올라가면 나무로 만든 배달통 옆에서 대만에서 가져온 월병을 먹으며 숙제를 하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습니다. 옛날 중국집 배달통이 나무였던 시절도 있었답니다. 함석판과 양철이 생산되면서 가볍고 단단한 현재의 배달통이 탄생하게 됩니다.
요즘 배달의 민족이라는 애플리케이션까지 발전한 걸 보면 '우리나라의 발전이 참 빠르고 가파르게 성장해왔구나 하고 느끼게 됩니다.'
방배동에서 탕수육과 짜장면을 먹으며 참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가, 대학 동창의 개인전으로 향합니다.
아직도 소년의 미소를 지닌 친구의 개인전을 둘러보고, 축하 메시지와 다음 만남을 기약합니다.
'다시 한번, 데뷔 전시회 축하한다.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