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버른을 간다고 하면 모두들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바로 커피. 하지만 나는 커알못이기에 멜버른이 커피가 유명하며 플랫화이트의 본고장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사실 모르고 갔는데 알고 보니 차이티라테가 어디에나 있는(개인 카페에도 웬만하면 다 있는!) 나라라는 것이 나에게는 더 큰 감동이었다며. 하지만 그래도 멜버른에 왔는데 잘은 마시지 못하더라도 라테 한 잔 마셔보자 하는 생각에 찾아가게 된 곳이 듁스커피였다. 멜버른의 카페를 검색하면 멜버른의 커피 3대장, 3대 커피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그 목록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곳이 바로 듁스커피이다. 듁스커피는 세인트폴 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카페를 들렀다가 제대로 보지 못한 성당을 다시 한번 둘러볼 생각으로 카페를 찾았다.
검은색 바탕에 흰색 찻잔으로 되어있는 매우 심플한 간판. 문 안으로 들어가니 크지 않은 공간이지만 우디한 실내가 아늑한 느낌을 준다. 메뉴가 제일 안쪽 벽에 붙어 있었는데 눈이 좋지 않은 나는(눈도 안 좋은데 안경도 안 끼고 돌아다니는 여행객이다) 카메라로 메뉴판을 찍어 보고야 어떤 메뉴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메뉴 확인 후 오른쪽에서 친절한 직원 분께 라테를 주문했다. 커알못인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인지 코코아가 메뉴에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코코아를 주문했겠지만 오늘은 커피를 마시러 왔으니 라테를 시켜야지.
그렇게 받아 든 따뜻한 라테 한 잔. 흰색 바탕에 검은색 로고가 박힌 심플한 컵에 담겨 나왔다. 카페는 주로 테이크아웃 위주인지 앉아서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얼마 없었고, 의자들은 이미 다른 손님들에 의해 착석되어 있었다. 다행히 서서 마실 공간은 남아있었기에 밖에 나가지 않고 안에서 마실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라테 한 모금을 마셔보았다. '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 나에게 커피란 그저 '쓴 음료'라서 내가 마실 수 있는 커피종류의 한계는 '연한' 아이스바닐라라테 정도이다. 그런데 이곳의 라테는 쓴맛보다는 부드러움과 고소함이 더 느껴지는 듯했다.
내 기억에 남아있는 '첫 라테'라고 한다면 우리나라에서 추운 겨울에 기프티콘을 선물 받아 시도해 보았던 던킨도넛의 커피이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내가 처음 마셨던 던킨도넛의 커피는 그저 '약간 느끼하게 쓴' 음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처음 마셔 본 라테였기 때문에 나에게 그 맛이 충격으로 남았는지, 그 이후에 스스로 라테를 마셔본 적이 거의 없는 듯하다. 그래서 이곳의 라테를 마셔보기 전에 조금 긴장했더랬다. 나의 '첫 라테'처럼 마시다가 미안하지만 버리게 되면 어쩌지 하는 마음에.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고 성당으로 가는 동안 홀짝홀짝 다 마셔버렸다. 커알못이 이런 이야기를 할 정도면 이곳의 커피는 꽤 괜찮은 커피가 아닐까 싶다.
세인트폴 성당 (St. Paul Cathedral)
듁스커피에서 나름 라테를 즐기려고 할 때 우연히 아침에 퍼핑빌리 투어에서 함께 했던 분을 만나게 되었다. 안 그래도 저녁을 함께 하기로 했는데 여기서도 만나다니 이런 우연이! 아침의 반일투어 이후 나도 퀸빅토리아마켓을 갔었는데 이 분도 그곳에 가셨다고 한다. 역시 관광객 코스는 다들 비슷비슷한 것일까.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연스럽게 세인트폴 성당까지 함께 하기로 했다.
원래 전 날 플린더스 역과 야라강가를 둘러보았기 때문에 이곳도 당연히 왔더랬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 도착했던 시점은 오후 4시 전후. 세인트폴 성당을 좀 더 찬찬히 둘러보고 싶었는데 잠시 숙소에 가야 할 일이 생겨서 숙소를 급하게 뛰어갔었다. 내가 찾아본 바로는 6시에 닫는다고 되어 있어서 '괜찮겠지?' 하고 다시 돌아와 보니 성당의 문이 굳게 닫혀있어서 내부를 잘 둘러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오늘 다시 찾게 된 세인트폴 성당. 1981년에 지어진 고딕 건축양식의 성당으로 내부는 역시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로 꾸며져 있다. 종교가 없는 나는 사실 성당에 들어와도 개인적으로 큰 감흥은 없다. 대신 나는 대체 이렇게 천고가 높고 멋진 건물이 그 예전에 어떻게 지어졌을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성당 오른쪽을 통해 걸어 들어가다 보면 굉장히 큰 파이프오르간도 볼 수 있는데, 19세기쯤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같이 갔던 분이 음악 전공이라 파이프오르간을 보자마자 오! 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 역시 사촌이 파이프오르간을 전공하여 한 번 졸업공연을 보러 갔던 기억이 있는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파이프오르간을 보니 신기한 느낌도 들면서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깨끗한 게 잘 관리가 된 것 같아 인상 깊었다.
Super Normal
성당을 잘 둘러보고 나와 야라 강가에서 맑은 하늘을 잠시 즐긴 나의 마지막 일정은 퍼핑빌리 투어에서 함께했던 분과의 저녁식사. 우리가 만난 곳은 Super Normal이라는 식당이었다. 이 식당은 호시어레인 근처에 있어 오늘 하루의 절반을 이 근처에서 보내게 되었다. (호시어레인, 세인트폴 성당은 바로 근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아시안 퓨전 레스토랑으로 호주의 유명한 셰프가 운영하는 곳이라고 한다. 원래 멜버른에 와서 이런 파인다이닝 느낌의 식당을 갈 계획이 아니었기 때문에 약속을 잡은 후 식당에 대해 조금 찾아보았다. 찾아보니 생각보다 예약을 잡기 어려운 곳이라는 글들이 나왔다. 하지만 다행히도 같이 갔던 동행 분이 먼저 자리를 잡고 계셔서 어려움 없이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어둑어둑해진 저녁의 공기를 마시며 밤에는 깜깜하여 조금 무서운 느낌의 호시어 레인을 지나 마주한 식당의 첫 느낌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뒷골목에 자리한 힙한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니 넓은 실내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저녁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평일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퇴근 후 즐거운 한 끼를 하고 있는 것이겠지. 문 앞의 직원 분은 어째서인지 나를 보자마자 안에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며 바(bar) 자리를 가리켰다. 동행분이 미리 이야기한 것이겠지만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이야기해 주는 센스.
기본으로 주는 해바라기씨를 앞에 두고 무엇을 먹을까 고민에 빠진 두 사람. 우선 New England Lobster Roll을 주문하기로 했다. 이 메뉴는 정말 끊임없이 서빙되고 있는 메뉴였는데 그럴만한 메뉴였다. 부드러운 빵 안에 들어있는 게살. 크기가 작은 것이 너무 아쉬울 만큼 눈 녹듯이 사라진 메뉴였다. 그리고 우리가 시킨 메뉴는 Lamb Shoulder. 혹시 두 사람이 먹기에 양이 어떤지 물어보니 많을 거라며 반사이즈(half-size) 주문이 가능하다고 친절히 설명해 준다. 그리고 기다림의 시작. 시킬 때는 양고기가 괜찮은지 이야기해 가면서 주문했던 터라 메뉴의 풀네임을 기억하지 못했어서 '왜 이렇게 안 나오지'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나중에 일기를 쓰면서 메뉴이름을 다시 한번 보니 그럴만했다. 이 메뉴의 이름은 "Slow-cooked" Lamb Shoulder였기 때문이다. 맛보기까지 조금 기다려야 했지만 기다림만큼 만족스러운 메뉴였다.
음식을 기다리면서도 별로지루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동행과의 대화도 한 몫했지만 식당 내부를 둘러보는 재미도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우리는 키친 가까이에 있는 바(bar) 자리에 앉아있던 터라 더욱 구경하는 재미가 컸다. 바 너머 가장 안쪽에는 오픈키친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고, 그만큼 우리 바로 앞의 직원 분들도 바쁘게 메뉴들을 만들어냈다. 바(bar) 바로 앞에는 주로 크게 익히지 않는 해산물 위주의 메뉴가 만들어지는 듯하다. 이야기를 하다가도 나도 모르게 멋진 메뉴를 뚝딱 만들어내는 그들의 손놀림에 시선을 뺏겼다. 아시안 퓨전 레스토랑이라 그런지 특히 음식을 만드는 분들 중에 동양계 직원이 많이 보이는 것도 이 식당의 특징이었다. '이 분들 중에 한국인도 있을까?' 같이 갔던 동행 분과 조심스레 추측도 해보며 즐거운 식사를 마쳤다.
어제까지만 해도 전혀 몰랐던 분과 전혀 갈 생각이 없었던 식당에서의 한 끼. 내가 멜버른을 가지 않았더라면, 퍼핑빌리를 가지 않았더라면, 퍼핑빌리 기차에서 그 자리에 앉지 않았더라면 있을 수 없었던 나의 오후와 저녁식사. 항상 느끼지만 여행은 언제나 나에게 예측하지 못했던 즐거움을 선사해 준다. 그래서 나는 여행이 좋고, 여행을 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