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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중아 Oct 29. 2021

Day 28 한라산 백록담

등린이의 위대한 도전

한장요약: It is finished. 다 이루었다!


지난주 영실 코스 이후 그래도 조금은 나아진 나의 체력에 대한 자신감으로, 지난 주 반신반의하며 예약해둔 한라산 등산을 실행에 옮기기로 한다.

한라산 다녀오면 일주일은 운신을 못 한다기에 마지막 주로 잡아두었고 지인들 방문 일정을 피하고 30일에 떠나려면 29일은 짐도 챙기고 해야 할 것 같아 28일로 당첨.

사실 등산은 날씨운이 팔 할인데, 더군다나 한라산 백록담은 3대가 덕을 쌓아야 본다고 할 만큼 날씨가 중요한 산행이 아닌가.

편의대로 날짜부터 잡아두고 날씨가 안 도와주면 취소하지 뭐,라고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정말 날씨가 다 한 산행이었다.


제주에 와서 1일1오름으로 체력이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기본이 저질체력인지라 되도록 일찍 나서기로 한다. 내 페이스대로 쉬엄쉬엄 오르다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갈 수 있는 데까지만이라도 갔다 오자는 마음이었다.

6시, 멀리 동이 터오는 것을 보며 서귀포 버스터미널로 향한다. 간발의 차로 12분 버스를 놓치고 24분 버스로 성판악 휴게소로 출발한다.

성판악 휴게소에서 다시 단단히 무장을 한 뒤 화장실도 들르고 7시 17분 드디어 QR코드 찍고 한라산 입산!

입산 직전에 한 아저씨가 물 세 통 필수, 그리고 이거 안 읽으면 올라가다 죽어요! 라며 코팅된 안내문을 내민다.

생각해보면 한달살이 초반에는 사려니 숲길 평지 10km 다녀왔다고 우쭐했는데, 오늘 등산은 편도 9.6km에 달하는 험한 돌길 산행이다. 너무 겁먹지는 말되 마음은 단단히 먹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으쌰으쌰 등산 시작.

성판악 코스는 듣던 대로 초반 평탄하게 이어진 산길이라 그리 어렵지 않다. 새벽이라 추울까 봐 꽁꽁 껴입고 왔는데 중간에 한꺼풀 벗고 다시 시작 8시 30분쯤 속밭 대피소에 도착했다.

잠시 간식도 먹고 귤도 까먹고 화장실도 들르고 다시 진달래밭 대피소로 향한다.

(지난주 산행에서 윗세오름 화장실에 들르지 않고 긴 어리목코스로 내려오느라 화장실이 너무 멀었어서 이젠 보이기만 하면 무조건 화장실에 들른다.)


진달래밭 대피소까지 안내도 기준 난이도 상의 빨간 구간,  어리목과 비슷한 느낌의 돌길과 계단길이 계속 반복된다.

중간중간 씁씁후후 숨을 고르고 달달이로 칼로리도 보충하면서 오르다 보니 9시 50분 진달래밭 대피소 도착.

싸온 김밥을 먹기엔 시간이 좀 이르고 백록담 표지석에 사진 줄이 길다는 글을 어디선가 봤기에 일단 먼저 백록담으로 오르기로 한다.

등산로 안내도에는 진달래밭 대피소부터 백록담 구간 2.3km는 분명 빨간색이 아니고 녹색이었는데, 이미 어느 정도 체력이 소진된 탓인지 길이 험한 돌밭 길인 탓인지 꽤 힘들오른다. 마지막 가파른 오르막 구간은 거의 로프를 잡고 기어올라가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이 구간은 어느 정도 전망이 트여있어서 간간이 뒤돌아 제주도 전체를 내려다보며 오를 수 있어 조금 위안이 되었다.

11시 20분 정상부 도착! 백록담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벌써 어마어마하게 늘어선 긴 줄이 눈에 먼저 띈다.

내 평생 한라산을 다시 올까 싶어 일단 줄을 서는데 땀이 식은 데다 고도가 높다 보니 정말 칼바람이 분다.

벗어두었던 후드도 껴입고 혹시나 싶어 준비해온 핫팩도 뜯어서 몸을 녹여가며 기다리기를 무려 한 시간.

쉬엄쉬엄 4시간 만에 백록담까지 오른 거면 내 기준 꽤 준수한 기록인데, 사진 한 장 찍겠다고 한 시간을 소요하고 나니 좀 허무하기도 하다.

그래도 날씨가 너무 좋아 백록담도 깨끗하게 잘 보이고 사진도 잘 나왔으니 그걸로 만족하기로 한다.

정상부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점심을 먹기는 좀 무리일 것 같아 오후 1시쯤 관음사 코스로 하산을 시작한다.

내려가자마자 처음 보이는 전망대에 부부동반으로 오신 듯한 8분이 이미 점심을 드시고 계시길래 구석탱이에 자리를 잡고 주섬주섬 어제 사둔 김밥과 아침에 끓여 텀블러에 담아온 누룽지를 꺼내는데 한 아저씨께서 컵라면을 건네주신다. 한 번 사양했는데도 강권하셔서 못 이기는 척 컵라면을 얻어먹고 김밥까지 먹으니 누룽지는 들어갈 자리가 없다. 컵라면을 다 먹고 나니 썰어온 오이와 파프리카까지 나눠주시고, 정말 감사해서 단체사진 한 장 예쁘게 찍어드렸다 (사실 관음사 코스는 소문대로 풍광이 엄청 좋아서 갖다 대기만 해도 다 달력 사진이다).

9.6km 성판악 코스도 4시간 만에 올랐으니 8.7km 관음사 코스로 내려가는 건 그보다 더 빠르겠지 생각하며 중간중간 뒤돌아 풍경도 만끽하고 쉬엄쉬엄 내려간다.


그런데 계단을 다 내려가고 나서 나타난 돌밭길을, 등산스틱을 양 손에 쥐고 불규칙한 돌표면에 행여 발목 돌아가지 않게 조심조심 내려오는데 아직도 5-24이다 (한라산은 250m마다 기둥에 뒷자리 숫자가 달라진다. 성판악 코스는 4, 관음사 코스는 5였는데 24라는 얘기는 아직도 내려갈 길이 6km가 남았다는 이야기...)

내 앞의 일행 중 한 분이 안내도를 보더니 진짜 열심히 내려왔는데 고작 이 정도 내려온 거냐며 징징거리는데 나도 가서 같이 손잡고 울고 싶었다.

어느 정도 내려가고 나니 풍경 보이지 않는 숲길에 여전히 돌밭 길인데 진짜 같은 곳을 뱅뱅 돌고 있나 싶을 만큼 영원히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다.

(참고로, 관음사 코스로 내려오면 두 개의 다리를 지나게 되는데 하나는 흔들다리고 하나는 목교이다. 처음 위쪽에 흔들다리에서는 예쁜 배경에 신나서 사진 찍고 돌아섰는데 다시 까마득한 오르막 계단이 나니 욕도 절로 나올 뻔했다. 기왕 다리 놓는 거 좀 높이 놓아주지... 두 번째 다리를 지나서도 또 계단이 나타나자 이번엔 진짜 육성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두 번째 계단은 오르면서 세어보니 108개, 관음사에서 지어줬나 싶었다는..)

중간 즈음 평상 데크에서 마주친 어느 어르신 하산하면서 벌써 세 번이나 넘어졌으니 레일을 좀 태워달라고 사무소에 전화를 하시는 중이었다. 다른 일행 남자분께서 듣더니 나를 보고 같이 얻어 타고 갈 거냐고 물으시길래 그 정도는 아니라고 했다 (물론 그 이후로 내려오면서 아, 아까 탈 걸 그랬나 싶긴 했다).

때마침 위에서 내려오는 레일을 그 남자분께서 큰 소리로 멈춰 세우고 어르신을 태워드렸다 (남편분께서 전화 중이셔서 아내분을 태우시나 했는데 본인이 타시더라. 아내분은 자기는 걸어내려 가겠다며 남편분 손절 ㅋㅋ)

다시 보호대와 스틱을 재정비하고 힘을 내어 하산을 계속한다. 서서히 물드는 단풍들 사이로 저무는 해가 발길을 재촉한다.

이후 아까 그 남자분과 그 친구들 일행과 함께 내려오게 되었는데 익숙한 말투에 여쭤보니 광주분들이셨다.

그 일행 중에 한 분도 조금 힘들어하시는 듯해서 다행히 나와 속도가 맞았고 6시가 가까워지니 벌써 산은 어두워지는데 정말 이 분들 없이 혼자 내려왔으면 훨씬 무서웠을 것 같다. 핸드폰 램프를 비춰가며 아직도 끝나지 않은 거냐며, 이 정도 가루 흘려가며 같은 자리 도는 거 아닌지 확인해야 할 것 같다며 그렇게 징징징징 거리며 드디어, 마침내, 결국! 주차장에 도착하니 무려 6시 반이다. 하산만 무려 5시간 반을 한 것이다.

오름을 다니며 등산용 근육은 어느 정도 붙어서 체력은 크게 떨어지지 않았는데 왕복 20km 가까운 험한 산길에 관절이 놀라서 이미 내 다리는 내 것이 아닌 듯 그저 달려있는 기분이고 발목은 가만히 있어도 시큰시큰거린다.

다행히 오래 기다리지 않 버스가 왔고, 한 번 더 갈아타고 서귀포까지 넘어와 버스 터미널에서 이제는 무념무상의 경지로 숙소까지 걸어 들어오니 저녁 8시.

너무 힘들어서인지 딱히 배가 고프다거나 입맛도 없어서 일단 빨래를 돌리고 대충 누룽지 조금 끓여 엄마 김치로 속을 채운다.

따듯한 물로 몸을 좀 풀어주고 폼롤러로 살살 문지르려는데 정말 느무 아프다.

어기적어기적 침대로 기어들어가니 그제서야 피로가 몰려온다.

내일 눈 뜨면 과연 두 발로 걸을 수 있을 것인가 살짝 염려가 되지만 그래도 제주 한달살이 버킷리스트 중 가장 어렵고 두려웠고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싶었던 백록담 등반을 성공했다는 뿌듯함이 뒤늦게 몰려온다.

대한민국 최고봉 한라산부터 찍고 나니 그깟 서울의 북한산, 관악산은 이제 웃으면서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물론 한라산이 코스가 길긴 하지만 그리 험한 은 아닌 편이라고 듣긴 했다).

무려 36,942보를 걸으며 저질체력 등린이가 무려 해발 1,950m의 한라산을 등정한 하루.

이제 다 이루었다,라고 스스로 칭찬하며 잠을 청한다.

(물론 예수님은 다 이루시고 난 뒤 사흘 만에 부활하셨지만, 나의 발목 관절과 무릎도가니는 언제쯤 다시 살아나려나 ㅠㅠ)


덧. 나의 저질체력을 익히 잘 아는 호적메이트들의 찐반응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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