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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가사리 Mar 29. 2021

나는 잘 '숙성'되고 있는가

'인생 맛집'엔 언제나 숙성이 있었다


맛집 탐방을 하다 보면 '숙성'이라는 단어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돼지갈비나 횟집을 가면 일정 시간 재우고 숙성시켰다는 홍보 문구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잘 숙성된 고기는 질기지 않고 육즙과 함께 맛이 잘 우러나온다. 회도 마찬가지다. 바로 슥 썰어낸 도톰한 회도 맛있지만 이리저리 쫄깃하게 씹히는 식감이 고추냉이와 어울려 입안을 감쌀 때 또 새로운 재미가 있다.


음식도 이럴진대, 나는 어떤가 늘 생각한다. 예전엔 '1만 시간의 법칙'이 많이 거론됐다. 어느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면 시간을 쏟아야 하는데 그게 1만 시간은 넘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말이 쉽지 1만 시간을 오롯이 쏟는 건 굉장히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럼 결론은 뭐냐. "제대로 몰입하고 숙성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다시 한번 골똘히 생각해 본다. "잘 하고 있는 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숙성이 아니라 썩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레몬청 하나도 설탕과 레몬의 비율이 맞지 않거나, 병을 제대로 소독하지 않으면 곰팡이가 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정도 시간이 흘렀으면 양조장에서 시간을 제대로 보낸 와인처럼 일과 인생이 감칠맛 나야 하는데 매일이 쓴맛이고, 괴로웠기 때문이다.


한 선배에게 이 고통을 이야기했더니 심드렁하게 "너 방향이 맞는 거냐"고 반문했다. 젓가락에 아슬아슬 매달려있는 숙주나물을 입에 넣으며 "야 대충대충 한 거 아닌지 한 번 생각해봐"라고 아삭아삭 소릴 냈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번 되돌아보니 열심히 한 것 같은데, 그게 시간이 흘러 짬밥이 생겨서 할 수 있는 이야긴지 아니면 정말 매사 잘했던 것인지 경계가 모호했다.


불현듯 내가 초등학교 때 수학 숙제하기 싫어서 해답지 보고 답을 써갔던 그 습관이 업무에서도 발현된 것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칼퇴, 휴식, 힐링 등 단어에 집착한 나머지 실력, 고통, 노력을 외면했던 것 아닐까. 제대로 숙성된 맛있는 갈비가 됐어야 했는데 그저 그런 상품성 없는 고기가 돼 버린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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