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의 주인공은 교복과 코트 차림에 검정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단정한 옷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삼선슬리퍼가 눈에 띄었다. 소영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어, 안녕...”
나정이 여전히 의구심을 품은 채 소영에게 인사를 건넸다.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죄송합니다.”
소영은 양해를 구하는 물음과 달리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거침없이 현관으로 들어섰다. 나정은 얼떨떨한 채 현관문을 잠갔다. 거실로 올라선 소영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집 열쇠가 없는데 엄마가 늦게 오셔서요. 날씨가 추워서 잠시 머물 곳을 찾고 있었어요.”
“어, 그래. 그랬구나. 그런데 왜 하필 여기로…?”
나정의 집은 파란 대문 하나를 공유하는 다섯 가구 중 하나였다. 1층에 세 가구, 2층에 두 가구가 하나의 건물에 속했는데, 30년은 족히 넘는 오래된 건물이었다. 도어록을 따로 설치한 나정과 달리 소영의 집은 여전히 현관문을 여는데 열쇠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나정은 저렴한 집값이라는 이점 때문에 이곳에 자리 잡고 산지 1년쯤 되어가던 차였다. 이웃들의 얼굴을 대강은 알고 있지만 가깝게 지내는 이웃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 데나 가기에는 무서워서 언니 혼자 살고 계신 여기로 와본 거예요.”
나정은 아직도 당황스러웠지만 소영에게 앉으라고 말했다. 소영이 거실 바닥 모서리에 놓인 이불더미 옆에 앉자 비좁은 거실이 더욱 좁아졌다. 나정은 무심코 냉장고문을 열었다가 금세 닫았다. 역시나 냉장고에는 마땅히 먹을 게 없었다.
“열쇠를 잃어버린 거야?”
“그런 것 같아요. 항상 가방에 넣어 놓는데 집에 와서 찾아보니 없더라고요.”
서 있던 나정 역시 바닥에 앉으며 물었다.
“저녁은 먹었어? 집에 먹을 게 아무것도 없는데 어쩌지.”
나정이 찬장에 라면이 있다는 사실을 숨긴 채 말했다.
“괜찮아요. 저녁 먹었어요. 우리 집하고 구조가 똑같은 집은 처음 봐요.”
소영이 집 내부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건물 안의 다섯 가구는 모두 집구조가 같다.
“엄마는 언제 오시는데?”
“음… 아마 한 시간쯤 뒤면 오실 거예요.”
어차피 그동안 글을 쓰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나정은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소영은 외동딸이며 고등학교 1학년이고, 성적은 중간쯤 간다고 했다. 그 나이대의 학생들이 대개 그렇듯 부모를 세상에서 제일가는 꼰대로 여기고 있었다. 이번에는 소영이 나정에게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백수야 백수. 작가가 꿈인데 이룬 건 없어.”
“언니처럼 집을 나와서 사는 거 너무 부러워요. 저도 집을 나가고 싶거든요.”
“백수의 삶이 뭐가 부러워. 나는 엄마랑 싸우다가 홧김에 충동적으로 뛰쳐나왔다가 이렇게 혼자 살고 있는 거야. 언니처럼 후회하지 말고 집에 잘 붙어 있어.”
나정이 장난스레 말하며 웃자 소영도 따라 웃었다. 말이 나온 김에 나정은 자신이 어쩌다가 집을 나오게 되었는지 설명해 주었다. 엄마의 잔소리, 갈등. 집중이 되지 않는 환경. 하지만 엄마가 해준 밥이 먹고 싶을 때가 있다는 이야기. 한결 가벼워진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던 중 소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려고? 엄마 왔나 보네? 그래, 잘 들어가.”
“아, 네. 이만 가볼게요.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소영이 떠난 뒤 나정은 자신의 방에 펼쳐 놓은 간이책상 앞에 다사 앉았지만, 이내 노트북을 끄고 거실로 나와 이불을 펴고 누웠다. 가족 말고 다른 사람과 제대로 대화를 나눈 게 얼마만인지 계산해 보던 나정은 이내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