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로 소영은 일주일에 두세 번 꼴로 나정의 집 문을 두드렸다. 아무리 방학시즌이라지만 나정은 고등학교 1학년인 소영이 너무 자주 놀러 와 공부할 시간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나정이 꼭 써야 하는 글이 있어서 오늘은 어렵겠다고 거절한 날도 있었다. 그러자 소영이 돌아서려는 시늉도 하지 않고 문고리를 잡은 채 그냥 들어가서 있으면 안 되겠냐고, 방해하지 않겠다고 사정하여 별 수 없이 들여보낸 적도 있었다. 그날 소영은 거실에 배를 깔고 누워 핸드폰을 보거나 책을 읽는 등 정말로 한마디 말도 없이 알아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노트북 앞에서 졸고 있던 나정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가 하면 나정 역시 몇 시간쯤 글을 제쳐 놓기로 마음먹고 소영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두 사람은 편하게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공통분모를 찾아냈다. 특히 각자의 엄마에 얽힌 에피소드를 늘어놓는 날이면 두 사람은 자신의 엄마도 똑같다는 반응을 보이며 깔깔 웃어댔다. 또한 소영이 저녁시간에 방문하면 라면을 끓이거나 김치볶음밥 따위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언니랑 같이 있으면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니까요.”
천진한 소영의 말에 나정도 동의했다. 둘은 열 살 차이였지만 서로를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어느 날 저녁 소영이 집을 나설 때 나정이 핸드폰을 건네며 말했다.
“네 번호 알려 달라고. 아무리 이웃집에 살고 있지만 핸드폰 번호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소영이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전화번호를 입력한 뒤 나정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나정이 통화 버튼을 누르자 소영의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인사를 하고 나와 발신자의 전화번호를 저장하던 소영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우리 집 비밀번호는 2580*이야. 혹시 우리 집에 올라왔는데 문이 잠겨 있으면 들어와 있어도 돼.]
소영은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 메모장 어플을 켜서 이 번호를 저장했다.
옆동네의 술집에서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신 나정은 돌아오는 길에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가까스로 몸을 가눈 그녀는 자주 들르는 동네 편의점의 문을 열었다. 음료수 냉장고에 가까이 다가가 유리문을 통해 보니 액상 숙취해소제는 단가가 비쌌다. 결국 그녀는 아무 음료도 고르지 않은 채 카운터로 다가와 담배 한 갑을 주문한 뒤 카운터 주변을 살피고는 비교적 저렴한 분말혈 숙취해소제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계산을 마친 다음 집을 향해 비틀비틀 걷던 중 그녀의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XX은행 30만 원 입금. 입금자명 : 박성환]
나정이 역시 아빠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맞은편에서 롱코트 차림의 젊은 여성이 걸어오다가 나정을 보고는 옆으로 살짝 피했다. 핸드폰 진동이 또 울렸다.
[돈 보냈다. 아껴 써라.]
투박한 메시지를 본 나정은 감사하다고 답장을 보낸 뒤 아빠가 보내준 돈을 어떻게 쓸지 고민하며 계속 걸었다. 그녀는 파란 대문에 들어서며 그 답을 찾았다. 집에 들어와 운동화를 벗자마자 거실에 누운 채,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놀이공원 티켓 두 장을 구매한 뒤 소영에게 오타로 가득한 메시지를 보냈다.
[쏘영! 시간 언제가 괜찬은지 말해ㅐ. 놀이공ㅇ원에 데려가 줄게.]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던 나정이 일어난 건 새벽 두 시였다. 그녀는 초췌한 모습으로 일어나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숙취해소제를 꺼내 입에 털어 넣고는 냉장고에서 물통째 물을 마셨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 노트북을 켜서 워드 파일을 연 뒤 커다란 글씨로 타이핑했다.
<아랫집 소녀>
나정은 두 시간쯤 타이핑에 몰두하다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노트북을 껐다. 그다음 겉옷과 양말을 벗어던진 뒤 간단히 씻고 나와 속옷 차림으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다시 잠을 청했다. 곧 코를 고는 소리가 집안을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