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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Spir e Dition X Feb 28. 2024

[e] 청춘. 가진 적도 없는 걸 그리워할 수 없어.®

■ 아이들은 미래라는 문제에서 조차 희망이 아닌 불안을 학습한다.


→ □ 누가 너희더러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되라든?

        다른 학생들 방해만 하지 말란 말이야. 수업에 안 들어와도 좋으니까


→  자퇴시키는 게 어떨까요?! 코미디언이라도 해 먹겠죠. 뭐. 

        코미디언은 아무나 하나요? <영화. 키즈리턴 중에서...>




https// : 욕망을 습득해야 환경에서 아이들은 과연 어른이 될 수 있을까?! com 


나는 태어나서 선생님이라 부를 만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나는 살아생전 어른이라는 존재를 마주한 적이 없다. 선생님 그리고 어른. 그 둘은 나에게 마치 공룡 같았다. 어딘가에 기록되어 사실이라 부르지만 유니콘처럼 마주할 수 없는 그런 존재. 단 한 사람이라도 삶의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는 어른이 없었다. 


교복, 두발 규제, 야간 학습 등등 학교에서 나열하는 규칙들은 학생들의 공부를 위함이라고 핑계를 대겠지만 창조성을 죽이는 환경을 만들어서 학생들의 개성을 죽이고 하나로 통일 시킬 때 통제권이 쉬워진다는 숨은 목적을 드러내지 않았고 선생님들은 자신만의 이득을 챙기면서 너희들을 위한다는 배려심까지 욕심을 채우기에 바빴다. 


조금이라도 뒤처지거나 넘어지는 아이들을 다그치며 모르다는 학생들에게 무지를 교육하기보다 부끄러움이라고 학대했다. 그런 선생님들에게 학생들이 배우는 건 교육이 아니라 무지에 대한 부끄러운 상처를 수용하는 일이다. 그들은 더 높은 위치에서 아이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기보다 아이들의 등 뒤로 바짝 붙어서 오직 속도에 악을 쓰기에 바빴다." 


모든 사람은 천재다. 하지만 당신이 나무를 오르는 능력으로 물고기를 판단한다면, 

물고기는 한평생 자신을 바보로 믿으며 살아갈 것이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https// : 청춘. 익사사건의 증거물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com 


배움을 통해 더해지는 건 지식이 아니었다. 친구가 늘어갈 때마다 비교 대상의 카운트 또한 올라간다.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푸는 건 벽에 가로막힌 것 같고 등 뒤로는 속도를 높이려는 고함소리는 더해져만 간다. 매일 아침 일곱 시 삼십 분까지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서태지와 아이들. 4번 트랙. 교실이데아 >


"선생님 저는 성공하는 삶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살고 싶은데요." 높은 단상에 올라 지휘봉을 맘대로 휘두르는 선생“님”이라 불리기를 원하시는 사람이 말했다. 넌 공부도 못하는 놈이 아무 쓸모없는 소리를 해대고 있어. 잘 들어. 학생의 본분은 공부야. 너네들 지금 공부해야지 미래의 배우자 얼굴이 바뀌는 거야. 그러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여기 봐! 이 공식부터 외워! 공부해! 학생의 의무는 공부하는 거야! 노력해야 성공할 수 있어! 성공하기 위해 이 공식을 외워! 더 빨리! 더 많이! 따라 잡히지 마! 따라잡아!


채찍질로 가득한 획일화된 고함을 거세게 지름으로서 학생들의 목소리를 덮어버리고 자신의 목소리가 어떠한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조차 앗아가 버린다. 그렇게 표현의 장이 폐쇄되면서 발언한 권리를 잃어버리는 아이들. 그렇게 아이들의 다양한 독창성은 죽이면서 일차원적인 성공의 공식 능력만을 살려나간다. 그곳에서, "규칙은 법이었고 청춘 익사 사건의 증거물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https // : 어른이 되기도 전에, 미래라는 문제에서 조차 희망이 아닌 불안을 학습한다. com


어느새, 친구가 경쟁상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밝고 올라서야 살아남을 수 있다.” 

고함소리가 이명으로 느끼지는 순간 배우게 된다. 학교는 단지 배움을 교육을 받는 공간이 아니라는 것. 수업을 받는다고 똑똑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지식은 경쟁을 위한 칼이라는 것. 학교에서 수업을 통해 배우는 것보다 학교라는 먹이사슬 환경에서 생존하는 게 더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것. 끝내 살아남아 졸업을 한다고 우리 모두가 어른이 될 수 없다는 것. 


난 명백하게 깨우치게 됐다. 그들의 공식을 따라 살아간다면 평생을 동시대에 친구들과 경쟁 속에서 싸워야 한다는 것과 내가 모르는 타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특출 난 인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 사실을 직면한 순간. 나의 길은 벽으로 가로막아버렸고 그제야 나는 멈춰 섰다. 결국, 결과를 내지 못하면 처분되는 경주마처럼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학교는 교육을 가르치기보다 그저 공식을 주입시키는 것에 급급하다. 여전히 할아버지 시절의 교육 방식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손자에게 답습되는 획일화된 교육은 아이들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생각할 필요가 없어진다. 우리가 다닌 학교는 배움의 환경이 아니었다. 그곳에서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서 나아가 끝내 스스로 독립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절대로 넘어지지 않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로봇에게 코드를 입력하는 것처럼 수많은 공식을 주입시킨다. 많이 넘어져 본 사람일수록 쉽게 일어선다.  반대로 넘어지지 않는 방법만을 배우면 결국에 일어서는 방법을 모르게 된다. <사이토 시게 타, 나를 위한 하루 선물>  


빌어먹을... 

Navigation 목적지 <방향> 설정이 잘못됐는데, 

아우토반에서 7000 RPM <속도>로 달려봐야 무슨 소용인가?! 


"나"답게 살아가야 하는 합당한 교육은 박탈당하면서 "남"들과 똑같아지는 일차원 삶의 공식을 주입받는 환경에서 말하는 삶은 성공하는 조건이지 그것이 행복한 삶은 아니다. "성공하는 삶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은 명백히 다르다." 아이들은 사회에 대한 본질과 시스템을 이해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독립된 존재로 키워진 것이 아니라 타인 <사회 규범, 규칙, 공식> = 그저 이미 누군가 정해진 규칙을 잘 따르는 아이로 교육되었다. 그렇게... 아이들은 어른이 되기도 전에, "미래라는 문제에서 조차 희망이 아닌 불안을 학습한다." 


Q. 당신의 청춘은 어땠나요? 

A. 그 녀석이 말했다. "가진 적도 없는 걸 그리워할 수는 없다고..."



사용할 일이 전혀 없는 지식을 왜 배우는 걸까. 


이를테면 f(x+y)= f(x) + f(y)를 가르치면서도 왜, 정작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 것인가. 왕조의 쇠퇴와 몰락을 줄줄이 외게 하면서도 왜, 이별을 겪거나 극복한 개인에 대해선 언급을 하지 않는가. 지층의 구조를 놓고 수십 조항의 문제를 제출하면서도 왜, 인간의 내면을 바라보는 교육은 시키지 않는 것인가. 


아메바와 플랑크톤의 세포 구조를 떠들면서도 왜, 고통의 구조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이 없는가. 남을 이기라고 말하기 전에 왜, 자신을 이기라고 말하지 않는 것인가. 영어나 불어의 문법을 그토록 강조하면서 왜, 정작 모두가 듣고 살아야 할 말의 예절에는 소홀한 것인가. 왜 협력을 가르치지 않고 경쟁을 가르치는가. 


말하자면 왜, 비교평가를 하는 것이며 너는 몇 점이냐 너는 몇 등이냐를 외치게 하는 것인가. 왜, 너는 무엇을 입었고 너는 어디를 나왔고 너는 어디를 다니고 있는가를 그토록 추궁하는가. 성공이 아니면 실패라고, 왜 그토록 못을 박는가. 그토록 많은 스펙을 요구하는 것은 왜이며, 그 조항들을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그냥 모두를 내버려 두지 않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냥 모두가 그 뒤를 쫓는 이유는 무엇인가. 


부러워할수록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누구이며, 

보이지 않는 선두에서 하멜른의 피리를 부는 것은 도대체 누구인가.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드. 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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