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은 퇴근해서 치울게
2월 3일 금요일, 결혼 D+56
직장인의 아침 준비 시간만큼 1분 1초가 소중한 시간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아침에 준비하다가 1분이 지체되면 알 수 없는 로직으로 사무실 도착 시간은 5분 이상 연기된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경험칙으로 100% 확률의 명제이다. 아침에 조금 미적거리면, 분명 크게 늦는다. 거두하지는 못했으니 절미하고 말하자면 아침 준비 시간(이하 ‘아준시’)은 그만큼 나에게 소중하다는 소리다.
그날도 여지없이 치열한 아침 준비의 현장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무거운 몸을 움직여 머리를 감고, 당시 길었고(지금은 단발이다) 그때도 많았던 숱이 엄청난 머리카락을 허겁지겁 말리는 중이었다.
나의 아침 준비 현장인 옷방으로 호떡이 침입한다. 바닥과 나를 번갈아 본다. ‘저 엄청난 머리카락들이 바닥을 더럽히고 있는 게 네 눈엔 안 보이니?’라는 눈빛이었다. 안 보인다. 원래 아침 준비할 땐 엄마도 아빠도 없는 거다.
짜증 섞인 표정으로 머리카락 좀 치우라는 얘길 들었을 때부터 입이 댓발 나오기 시작한다. 아 뭐 알겠는데, 지금은 소중한 아준시라고! 건드리지 말란 말이야! 대답까지 할 정신은 없고 불쾌함만 켜켜이 쌓인 마음씨로 드라이어만 연신 돌려댔다. 아준시의 1분 1초는 너무나도 소중하니 잔소리 집어치우고 제발 이 구역에서 나가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호떡은 더 다급하게 나를 채근하기 시작한다. 알았으면 알았다, 아니면 아니다 뭐 대답을 해보라는 거지.
결국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했다. 지치다 못해 화가 난 호떡은 그대로 집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호떡이 나가자마자 밀려드는 후회의 조각들을 채 맞물리지도 못한 채 나도 출근시간에 쫓겨 회사로 가는 지하철에 올랐다.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은 하고 싶은데, 아직도 잘 되지 않는 것은 호떡과 싸운 날 온전히 회사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뭘 했는지 생각도 나지를 않게 아무 일도 못했다. 2017년 2월은 개인적으로 회사 안에서의 심란함 때문에 괴로워했던 시기였는데, 하필 호떡과 싸우고 오니 더더욱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남겼다.
― 아침에 그렇게 보내서 미안해
― 왜? 넌 나랑 말하기 싫어하잖아 입 딱 다물고
머리카락 그렇게 정리해달라고 해도
안 정리하고 화나고 짜증 나도 입 다물지 말고
얘기해달라고 해도 얘기도 안 하고
나한테는 이거 하지 마 저거 하지 마 다하면서
왜 넌 안 해 전두환이야 노태우야*
열띤 항변이 시작되었다. 내가 전두환이나 노태우급 독재자 성향을 가져서가 아니라, 타고난 성향 자체가 아준시에 누군가가 방해를 하면 영향을 크게 받는다고. 이건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이기도 했다. 내가 독립하기 전에 나는 방 안에 있는 전신거울 앞에 주저앉아 화장을 하곤 했는데, 내가 화장하는 게 신기하셨던 모양인지 엄마는 늘 옆에 슬그머니 다가앉아 내 화장을 구경하고 이것저것 말을 덧붙이시는 게 취미셨다. 난 그때도 정말 너무 준비하는 데 영향을 받아서 제발 화장할 때 내 옆에 오지 말아 달라고 부탁까지 했는걸!
아침에 하기에 버거울 정도로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닌 걸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끝내 자기가 치울 때까지 방치되는 내 머리카락이 싫다는 게 첫째, 그리고 그게 정말 그렇게 영향을 많이 줄 정도의 일이라고 한다 해도 퇴근하고 나서 치울게 정도의 말로 대답하기만 했어도 호떡은 크게 화가 나지 않았을 거란 것이 둘째 이유였다.
아무 말 없이 입 꽉 다물고 버티는 거 정말 싫다고, 다음번에 또 이러면 그때는 말로 안 한다는 말을 일갈하며 호떡이 싸움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내가 머리카락을 치우지 않는 것을 차마 견디지 못해 가끔은 본인이 대신 치우기도 하던 호떡은 어느새 모든 의욕을 상실해버렸고, 우리 둘은 아무도 치우는 데 기력을 쓰지 않고 집을 더럽게 만드는 데 성공(?)하면서 서로의 싸움거리를 줄이게 되는 쾌거(!)를 이뤘다.
*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화가 나면 늘 나에게 ‘전두환’이나 ‘노태우’ 같은 이름을 들먹이곤 하는데 별로 타격을 받지는 않는다. 나는 임씨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