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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애 Oct 24. 2021

안녕하세요. 대한민국 자영업자입니다. #8

제1장. 스터디 카페를 열기로 한 건 꽤나 멍청한 생각이었다. ⑧

#3. 2, 2, 2그놈의 2! (2)


 2021년 새해가 밝았다. 방역당국은 1월 2일, 수도권 2.5단계 조치를 2주 더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비수도권도 2단계가 적용된다고 했지만 다른 지역까지 신경 쓰기엔 내가 처한 상황이 너무 시궁창이었다.


 12월 매출은 10,182,000원으로 회사에 다닐 때보단 월수입이 높았다. 하지만 들인 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투자비용 회수까지 생각하면 아직 갈 길이 구만리였다.


 게다가 생전 처음 일주일 이상 지속되는 불면증도 나를 힘들게 했다. 새벽 세네시는 되어야 잠이 들었는데, 잠이 부족해 머리가 너무 아픈데도 동이 틀 때면 거짓말처럼 눈이 떠졌다. 아직 새벽잠이 없어질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몸이 그랬다. 덕분에 두통이 기저질환으로 자리 잡았다.


 방학이 되어서인지 학생들은 스터디 카페를 더 찾지 않았다. 내뱉듯 던진 하소연에 친구는


 '이 동네 애들 원래 공부 더럽게 못 하잖아.'


라는 지역 차별성 발언을 서슴없이 뇌까렸다.


 '우리도 이 동네에서 자랐어 인마.'


라는 타박에는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꽤 괜찮을 수 있었던 거야.'


라는 오만한 답변이 돌아왔다. 친구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라는데 나도 이런 사람인 것일까 하는 생각에 자괴감이 물밀 듯 밀려들어왔다. 예전엔 아무렇지 않게 했던 말들이 자꾸만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중고등학생이 줄어든 자리는 성인들이 조금씩 메워주었다. 알아보니 공무원 시험, 회계사 시험, 공인중개사 시험 등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성인들이 스터디 카페를 찾는 큰손이라는 전언이었다. 성인들은 서로 속닥이지도 않았고, 지우개 가루도 배출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당일권이 아닌 기간권을 결제했다. 가격이 올라가면 기간권 매출이 떨어질 것 같아 기간권 가격은 아직도 오픈 특가인 11만 원이었다. 가격 복구는 매출이 조금 회복된 이후, 그때 하기로 했다.


 2.5단계가 끝나가던 1월 16일, 정부는 1월 31일까지 2.5단계를 2주 더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지금 확산세를 잡지 못하면 정말 큰일이 날 수 있다는 경고도 함께였다.


 이때쯤 미국, 영국 등 선진국들에선 일반인들에게도 백신 접종이 본격화되었다. 우리나라는 코로나 감염 고위험집단인 요양시설이나 의료 종사자조차도 아직 백신을 맞지 않은 상황이었다.


 1층 삼겹살집에서 점심식사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메뉴는 점심특선으로만 판매하는 삼겹 김치찌개였다. 사장님과 함께 뉴스를 보고 있는데 사장님이 무심한 듯 툭 한 마디를 건넸다.


 “백신이라도 좀 맞으면 이놈의 집합금지도 좀 풀릴까?”


 “아무래도 그러겠죠. 경제 살리겠다고 미국하고 유럽이 저러고 있는 거잖아요.”


 “우리는 11월은 되어야 다 맞는다는데.”


 “11월이요?”


 순간 입안에 있던 밥풀이 다 튀어나왔다. 사장님의 얼굴엔 이미 표정이 없었다.


 “어떡해. 백신을 못 구했다는 걸. 그것도 계획대로 일이 풀렸을 때 말이야.”


 11월이면 늦어도 너무 늦었다. 백만분의 일의 확률로 거리두기가 11월 전에 풀리지 않는다면 상황은 정말 어려워질 것이었다. 사장님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이놈의 코로나가 빨리 사그라들어야 했다.


***


 1월의 마지막 날, 정부는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를 2월 14일까지 2주 더 연장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설에 사람들이 이동하며 코로나가 퍼질 것이 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사람 목숨이 소중하다는 것에도, 코로나를 빨리 잡아야 한다는 현실에도 동의했다. 단지 받아들이기 힘든 건 왜 모든 방역책임을 소상공인이 져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방역수칙을 어긴 손님은 벌금이 10만 원이지만 그 손님을 걸러내지 못한 가게는 수백의 벌금을 물었다. 동네 식당엔 개인정보를 적어야 들어갈 수 있어도 백화점이나 놀이동산엔 그냥 들어가도 괜찮았다. 대중교통은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정부의 입장이 이해가 갔다. 그들 역시 창의력과 공감능력이 떨어져서 그렇지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다. 그렇다고 믿어야 오늘을 버틸 수 있었다.


 열심히 하면 잘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인가. 학창 시절부터 회사, 사업까지 적용되는, 무어라 답을 내리기 힘든 딜레마였다. 마음은 열심히만 해도 괜찮은 거라는데 머리가 자꾸만 닥치고 제발 잘 좀 해보라며 윽박을 질렀다. 결국은 자신에게 내지르는 호통이었다. 또다시 머리가 아팠다.


 방역조치가 끝나는 날 하루 전인 2월 13일, 수도권의 방역조치가 드디어 2단계로 내려간다는 속보가 흘러나왔다. 욕먹어야 잘하는 것을 보니, 방역당국도 변태인 것이 틀림없었다.


***


 드디어 마주한 2단계 적용기간은 2월 28일까지인 2간이었다. 그 사이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국민 10명 중 6명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화해야 한다고 답했다는, 믿을 수 없는 소식을 공개했다. 정부는 또다시 자영업자의 어려움 때문에 쉽지 않다는 뉘앙스의 답변을 내놓았고, 자영업자들은 또다시 비난의 화살을 받아내는 과녁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이번 자영업자들의 반응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아무리 욕을 먹어도 괜찮으니 영업제한을 풀어달라는 것이었다. 코로나는 걸려도 안 죽을 수도 있지만 이대로 계속 가면 굶어 죽을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2월 26일, 정부는 3월 14일까지 2주 동안 2단계를 연장한다고 발표했다. 2.5단계로 단계를 높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이런 결정을 내려준 방역당국에 눈물이 나도록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


 3월 12일, 2단계 조치를 3월 28일까지 2주 더 연장한다고 방역당국이 발표했다. 5인 이상 집합금지는 여전했다. 횟집 사장님은 배달을 주 업종으로 메뉴들을 변경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삼겹살집 사장님은 올여름 계약 만료 때 가게를 빼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며 아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자리에서만 무려 12년 동안 장사를 해온 사장님이었다.


 2층 이자카야 사장님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들은 건 그 대화를 나눈 며칠 뒤였다. 이자카야도 이자카야지만 길 건너편 상가 지하에서 운영하던 노래방 부채를 갚지 못해서였다는 소문이었다. 룸이 스무 개도 넘게 있었던 큰 노래방은 너무 오랜 기간 손님을 받지 못했고, 어느 순간 보증금은 물론 대출까지 다 까먹었으며, 사채를 써도 월세와 생활비를 감당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고 숨을 고르며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몇 달 동안 닫혀있던 이자카야 안에서 젊은 여자가 걸어 나왔다. 숨진 사장님의 딸이라고 했다. 아직 대학생이라는 여자는 머리에 하얀 리본을 꼽고 있었다.


 “저 2층 사장님 딸이에요.”


 “아, 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엄마가 유서에 여기 사장님들 다 좋은 분들이시라고, 혹시 가게에 있는 물건들 쓸 만한 것 있으면 사장님들께 드리라고 남기셔서요.”


 감사하다고,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빈다고 말한 후 스터디 카페로 올라왔다. 노래방은 거리두기 2.5단계와 3단계 하에서는 운영을 중단해야 했고, 2단계일 때에도 오후 9시부터 오전 5시까지는 영업을 금지당했다. 메인 영업시간에 영업을 할 수 없었으니 아무런 방법도 없었을 것이었다.


 모두가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정책담당자들이 이해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파왔다. 그에 반해 스터디 카페는 24시간 영업이 가능한 업종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3월 26일, 거리두기 2단계가 4월 11일까지 2주 더 연장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


 4월 9일, 방역당국은 새삼 창의적인 발표를 했다. 거리두기 2단계를 2주가 아닌 3 연장한다는 공지였다. 이번 연장 조치로 5월 2일까지 2단계가 더 연장되었지만 그래도 2주가 아닌 3주라는 사실에 신선함을 느꼈다. 한 번만 더 2주 연장 이야기를 들었다가는 화병이 나 드러누웠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이었다.


 그 사이 스터디 카페의 매출은 뚝뚝 떨어져 700만 원선을 위협받았다. 2.5단계도 아닌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싶었더니, 바로 한 블록 거리에 새 스터디 카페가 생겨버렸다. 여기는 학원가도 아니고 아파트 단지를 끼고 있는 곳도 아닌데 도대체 이곳에 무슨 볼 것이 있다고 새 스터디 카페가 들어선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심지어 새로 들어선 곳은 유명한 프랜차이즈 스터디 카페였다.


 이대로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었다. 현수막을 만들어 건물에 걸고, 한 시간 이용금액을 이천 원에서 천오백 원으로 내렸다. 돈을 받고 팔던 음료들엔 기본 한 잔 이벤트를 진행했고, 근처 학원들엔 학원 홍보 브로슈어를 배치해주겠다고 영업을 시작했다.


 누군가는 단가를 내리면 모두가 죽자는 이야기라며 말렸지만, 원금 회수도 못했는데 혼자 앉아 죽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5성급 호텔의 로비 향과 비슷한 고급 디퓨저를 준비했다. 가장 호응이 좋았던 건 한 달에 한 명을 추첨해서 현금 10만 원을 주는 현금 살포 이벤트였다.


 4월 30일, 수도권 2단계 거리두기가 5월 23일까지 3 더 연장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3주도 두 번 들으니 더 이상 참신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마이너스는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다행히 신용재단 보증 대출은 1년 거치 4년 상환이었다. 원금 상환까지는 아직 조금 더 여유가 있었다.


***


 5월 21일, 방역당국은 이번에도 수도권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3 연장된다는 사실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피해는 자영업자가 다 보는데 왜 자영업자의 목소리가 방역정책에 반영되지 않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저 답답했다.


 다행인 건 이젠 회사에 다시는 회사원들, 집에서 집안일을 하는 가정주부들,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까지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겹게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우리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조금 더 늘어났다. 시간은 분명 우리 편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출구 없이 궁지로 몰아넣는 무자비한 놈도 아니었다.


 결국 정부는 5월 26일, 새로운 연간계획을 발표했다. 한 마디로, 끝이 보인다는 이야기였다.


 6월 1일부터는 5인 이상 집합금지가 조금 완화된다고 했다. 가족모임을 할 때 백신을 맞은 사람이 있으면 인원 제한에서 제외해주겠다는 설명이었다. 7월부터는 백신을 맞은 사람들 대상으로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를 해제하고, 10월부터는 코로나 이전의 일상을 회복하겠다고 선언했다. 12월 이후에는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도 완화할 계획이라는 설명을 들으며


 나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정말 끝이 보이고 있었다. 1층으로 내려가 삼겹살집 사장님과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한 편의 시트콤처럼 사장님은 엉엉 소리를 내며 어깨를 들썩였다. 성인 남성, 그것도 장년층 남성이 그렇게 서럽게 우는 모습을 직접 본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만큼 의미 있는 규제 해제였다. 그래도 죽진 않을 수 있겠다고 말하며 사장님은 대부업체에 월세를 빌리러 갔다. 여름이면 장사를 재개할 수 있고, 가족들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란 희망 때문이었다. 백, 이백 하는 보조금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장사만 원래대로 할 수 있게 해 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율 22%로 돈을 빌렸다는 사장님은 육이오 겪으신 우리 아버지는 나보다 더 힘드셨을 테니까,라고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사장님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장님의 손을 꼭 부여잡아주는 것뿐이었다.


 거리두기 2단계는 7월 4일까지 3가 더 연장되었다. 그래도 7월부터 새로운 거리두기가 적용되면 모든 것이 정상을 찾을 것이란 생각에 이번엔 조금 더 잘 버텨낼 수 있었다.


***


 7월 1일, 거리두기 체계가 기존 5단계(1-1.5-2-2.5-3)에서 4단계(1-2-3-4)로 간소화되었다. 규칙을 세세하게 만들면 그만큼 빈틈 역시 많아진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천편일률적으로 적용하면 무고한 희생자들을 양산시킬 수 있으니 정말 제대로 일을 해야 한다는 교훈까지 얻을 수 있는 값진 시간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여러 방역조치들이 해제되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확진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치솟기 시작했다. 서울시는 치솟는 확진자를 감당하지 못해 기존 5단계 안을 1 연장하겠다는 브리핑을 진행했다. 그리고 1주 후, 기존 5단계 안을 1만 더 연장하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무언가 일이 잘못되고 있었다.


 7월 9일, 방역당국은 서울에도 7월 12일부터 새로운 거리두기를 적용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서울에 적용되는 건 1단계, 2단계, 3단계도 아닌 무려 4단계였다. 시작하자마자 적용되는 거리두기 최고 단계에 불안감이 높아졌지만 확진자 수는 그보다 더 위태한 모습으로 치솟는 중이었다. 그래도 4단계를 7월 25일까지 2만 적용하겠다고 해서

 믿어보기로 했다. 정말 짧고 굵게 4단계가 끝날 수 있을지, 자꾸만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그날 저녁, 대학 동기 중 한 명이 결혼을 한다 하여 새 단톡방이 만들어졌다. 막상 주인공은 초대받지 못한 단톡방에서의 대화 주제는 부동산, 주식, 그리고 방역조치였다. 대학 친구들은 아직 내가 스터디 카페를 차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친구들은 막말을 했다.


- 얘들아, 이번에 기사 봤어?

- 뭘?

- 자영업자들 말이야.

- 뭐라는데?

- 코로나 이렇게 심각한데 방역조치 풀어달라고.

- 미친.

- 정신 나갔구먼?

- 가족 중에 누구 하나 코로나 걸려서 죽어봐야 그따위 말을 안 하지.

- 그러니까. 누가 장사하라고 등 떠밀었나. 지들이 선택한 거면서.


 단톡방을 나갈지, 내 상황을 설명을 할지, 그것도 아니면 이 대화에 끼어들어 싸움을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잠시 고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다. 지난달 매출은 3,216,000원이었다.


 손님들이 볼까 겁이 났다. 서둘러 계단을 통해 옥상으로 뛰어올라갔다. 올라가다 마주친 4층, 5층은 어느새 모두 공실이었다. 그래도 처음 왔을 땐 뭐하는 곳인지는 몰라도 사무실들이 있긴 있었는데, 지금은 없었다. 어지럽게 쌓여있는 지로용지들과 전단지들 때문에 심장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래도 IMF 때는 다 같이 힘들기라도 했지, 지금은 그것마저도 아니어서 정신적으로 더 힘들었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도 눈물이 났다. 심장은 지나치게 빠르게 뛰었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았고, 두통이 심해졌다. 그날 저녁 통화에서도 부모님께는 사업이 잘 되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연기를 하는 스스로가 비참해 침대에 누워서도 끅끅대며 울었다. 머리를 조이고 있던 나사 하나가 풀려버린 느낌이었다. 감정조절장치가 완전히 망가져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자괴감이 들었다.


 7월 23일, 수도권 4단계, 비수도권 3단계 조치가 8월 8일까지 2 더 연장된다는 속보가 흘러나왔다.


 다음 날 아침, 무기력하게 출근을 하고 있는데 건물 앞에 서있는 앰뷸런스를 발견했다. 방역복을 입은 구급대원들은 꽤나 다급한 모습이었다.


 구급차에 실려 간 사람은 다름 아닌 삼겹살집 사장님이었다. 쓰러진 사장님 옆에는 빈 소주병이 아홉 병 놓여있었다고 했다. 다행히 사장님이 깨어나셨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더 이상 가게에서 모습을 볼 순 없었다.


 8월 8일, 수도권 거리두기 4단계가 8월 22일까지 2 더 연장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


 내가 조금 이상해진 것을 눈치챈 사람은 다름 아닌 1층 횟집 사장님이었다. 횟집 사장님은 나를 동네 정신건강의학과로 데려갔다. 친척 중에 딱 나 같은 증세를 보인 사람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약물 치료가 필요한 심한 우울증이었다는 것이다. 배달이 잘 되어 매출이 오히려 늘어났다는 횟집 사장님은 배달 한 건에 배달료 삼천 원에서 칠천 원을 부담해야 해 순수익은 오히려 적자라며, 위드 코로나가 되는 즉시 배달을 때려치울 것이라 언성을 높였다. 그 분노와 유쾌함에 웃음이 배어 나왔다. 실로 오랜만에 소리 내어 터뜨린 웃음이었다.


***


 정신건강의학과의 의사는 그저 내 말을 듣기만 할 뿐 딱히 무어라 조언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에 화가 났다.


 돈이 아까웠다.


 “저기 선생님, 듣기만 하지 마시고 무어라 말 좀 해주세요.”


 “어떤 말을 듣고 싶으신데요?”


 “지금 상담하는데 들어가는 돈이 아깝지 않을 만한 솔루션이요.”


 “음, 그럼 약 먹지 않고 나아질 수 있는 방법 하나를 알려드릴게요.”


 옳거니. 원하던 대답이었다.


 “좋아요. 어떤 거든지요.”



 “홈페이지를 하나 만드세요. 네이버 블로그도 좋고, 카카오 브런치도 좋고. 그곳에 자영업을 하는 사장님들의 인터뷰를 정리해보세요. 마치 한 편의 기사처럼.”


 “인터뷰라고요?”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루션을 말해달라고 해서 말해주지 않았느냐는 표정이었다.


 “물론 섭외부터 난관이겠지만 그래도 하다 보면 제가 왜 이런 숙제를 드렸는지 아시게 될 거예요. 진짜 하실 수 있으신 분 같아서 말씀드렸으니까 한 달 뒤에 만달 때 꼭 숙제 해오세요. 사이트는 알려주시면 제가 첫 번째 구독자 할게요.”


 이것이 시작이었다. 프리랜서 인터뷰어로서의 첫걸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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