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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 Oct 21. 2023

열 재주의 축복

할머니의 저주는 힘을 잃었다

  초등학교 때는 상장을 이런저런 이유로 아이들에게 참 많이도 줬고 잔재주가 많았던 나는 학교에서 주는 상장들을 제법 챙겨올 수 있었다. 어느 날은 학교 대표로 미술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았고 교무실에서 상을 받아오자마자 아이들은 받아온 메달을 달라고 하더니 돌아가면서 이빨로 깨물어봤다. 내 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빨 자국이 여럿 생겼다.


 기분이 조금 상했지만 그런다고 이빨 자국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기에 더 물지만 못 하게 하고는 메달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는 잠시 불쾌했던 마음이 가라앉았고 원래 누렸어야 할 기쁨을 마저 만끽했다. 받아온 메달을 연신 꺼내 보다가 급기야는 나도 이빨로 깨물고 있었다. 할머니가 그런 나에게 “열 재주 가진 사람이 빌어먹고 사는 법이다. 네 아빠를 봐라. 실속이 하나도 없다.”라고 말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할머니의 저주는 아직 유효한지 열 재주를 가진 나는 아직도 부모님 집에 얹혀살고 있다. 백수답게 느릿느릿 일어나 주린 배를 움켜잡고 밥통을 열어 밥을 푸다가 안방 문틈으로 엄마 아빠가 TV를 보며 식사 중인 모습이 보였다. 뭔가 노부부의 밥을 뺏어 먹는 느낌이다. 보탬이 되지는 못할망정 축내고 있다. 갑자기 밥 먹을 맛이 뚝 떨어진다. 이내 밥통 뚜껑을 닫고는 집 주변을 어슬렁 거리며 걷고 있다.


 대학 나와서는 회사에서만 돈을 벌 수 있는 줄 알았다. 생각해보면 고등학교 때도 수능 보고 나서는 이따금 식당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어차피 규모가 있는 기업이 아니고서야 전문직이 아니고서야 사무직이든 서비스직이든 최저임금 언저리의 급여를 줄 따름인데. 그리고는 경력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대로 기를 죽이고 경력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깎아내려 기어코 싼 값에 부리고야 마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수험 전에는 가지고 있는 열 재주를 외면하고 그렇게 내 주변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흉내 내며 살았다. 양질의 일자리는 많지 않고 제법 준비가 필요하기에 돈 벌면서 준비만 하다 시간이 많이 가버렸다. 수험 전에 살던 대로 살지 않기 위해서 여러 시도를 하고 있다. 일단 주소정 근로 40시간을 피하고 있다. 남은 시간에는 책을 읽고 글도 쓰며 매듭도 배운다. 내가 가진 열 재주 중 일부를 단련 중이다. 듣던 대로 혹은 당장은 돈으로 만들 깜냥이 되지 않아서 생활비 버는 목적의 일과 병행하곤 했는데 당분간은 실업급여가 나와서 근로는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냥 편한 것은 아니다. 몸은 일할 때보다 확실히 편한데 마음은 그렇지가 않다.


 밖에 나와 조금 걷다 보니 배가 고팠다. 음식점으로 들어가서 좌석마다 놓여진 키오스크에 메뉴를 주문하고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빙봇이 내 일용할 양식을 가지고 다가왔다. 사람들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존재치고는 고양이 같은 모습의 외관이 상당히 귀여웠다. 로봇을 써도 이 식당은 꽤 바쁜지 주방 쪽이 분주해 보였다. 서빙 로봇에 키오스크에 AI 같은 것들이 사람들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지만 사람이 아주 필요 없어지는 건 아닌 듯하다. 줄기야 줄겠지만 외국인 노동자까지 데려와서 일 시키는 지금은 괜찮은 듯하다. 인력사무실 가면 사람이 없다. 소개비는 아깝지만 가면 바로 돈을 벌 수는 있다. 지금 당장 몇 달은 크게 문제가 되어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몇 년 이상까지는 장담을 못하겠다.


 지금 내가 가는 길이 불안하지 않냐고 묻는다면 나조차도 뜻밖인데 불안하지 않다. 부모님도 안정적인 소득원이 있어서 날 키워준 게 아니었다. 장사하고 남의 집 일 해서 돈을 벌어 키워줬다. 그래서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 보상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내 길은 아니었나 보다. 한편으로는 부모님이 생활을 영위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정적이지는 않았지만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


 게다가 안정된 것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막상 꼭 안정적인 것도 아니었고 안정을 빌미로 틀 안에 갇혀버리기도 했다. 안정된 것이 아니기에 여러 갈래로 갈 수도 있고 뜻밖의 예측하지 못한 성장도 노려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뭐가 무서워서 예전에는 이런 생각을 못 했는지.


 배도 다 채우고 조금 걷다 보니 비가 내렸다. 올여름은 장마 아닌 날이 아마 별로 없다지. 집에 와서 씻고는 내 방 애착 이불 속으로 폭 들어갔다. 그리고는 눈만 빼꼼 내놓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이제는 수험서가 아닌 대중서로 가득 찬 책장, 여기저기 뒹구는 돌, 다 만들었거나 만들고 있는 매듭들. 사놓고는 거의 쓰지 않고 있는 프린터, 내 팔뚝을 단련시켜준 무거운 노트북. 내가 잘하고 관심 있어 하는 것들로 공간을 매우고 있었다.


 예전에는 대중서 하나 맘 편히 보질 못했다. 외울 건 많고 하루는 짧아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달까. 더불어 수험 서적이 아닌 책을 보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었다. 꼼지락 꼼지락 손을 가만두지를 못하는데 예전에는 연중행사로 매듭을 만들었던 거 같다. 그냥 남들 보는 것만 눈팅을 잔뜩 했던 기억이 난다. 나도 언젠가는 많이 만들거야라고 되뇌이면서 그렇게 당장의 행복을 미루고 가시적으로는 현재 아무것도 남지 않은 수험공부로 하루를 매진했다. 왜 하루는 48시간이 아니냐는 푸념과 함께 말이다.


 수험생이 아닌 지금도 하루가 48시간이 아닌 것에 대한 불만이 있다. 세상에 읽을 책은 많고 절판도서가 아닌 이상 어떤 경로로든 구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불어 매듭은 하나 만드는데 꽤 시간이 들어간다. 자질구레한 재주를 여러 개 가지고 있어서 이런저런 일들 두드려보고 있는 지금의 나. 열 재주 가진 사람이 빌어먹고 산다는 어린이의 가능성을 제약했던 과거의 언어에서 벗어나는 중이다. 태어나서 자기 손으로 만원도 안 벌어본 할머니의 말이 뭐라고 홀랑 믿었는지. 할머니의 저주는 이제 힘을 잃었다.


 그러다 책장 위 상자에 시선이 머물렀다. 내 열 재주를 증명해주는 상장들이 파일 두 개에 가득 꽂혀 있었다. 지금 당장 돈이 안 되어도 내 소중한 자산이고 보물이다. 내 재능을 무시하지도 저주라고 생각하지도 않겠다. 내 열 재주는 은사고 축복이다. 정해진대로 취업하지 않아도 결혼하지 않아도 시도할 수 있는 길이 많아서 좋다. 운이 좋다면 잘 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열 재주 나쁘지 않다.


이미지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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