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일호 사람들] 공씨아저씨네 공석진 대표
공공일호에는 미래를 위한 실험과 새로운 시도에 도전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4층 코워킹 스페이스에는 LAB2050, 농사펀드 및 여러 미디어 스타트업 회사가 입주해 일하고 있습니다. 3층 learning Lab에서는 거꾸로캠퍼스와 온더레코드가 다양한 교육 실험을 하고 있고요.
공공일호에서 어떤 분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공공일호 인터뷰]에서 전해드립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관심사, 생각, 좋아하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습니다.
글, 사진 | 커뮤니티 매니저 우주
001라운지에 올라가면 늘 같은 자리에서 여유롭게 업무를 보고 계신 공석진 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온라인 구멍가게'라고 표현하는 과일가게 '공씨아저씨네'를 운영하고 계시는데요. 브런치에서는 재미있는 글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사진, 오랫동안 고민한 흔적이 담겨 있는 글에서 석진님이 더욱 궁금해졌답니다. 함께 만나볼까요?
안녕하세요, 석진님! ‘온라인 구멍가게’를 조금 더 설명해주세요. 어떻게 시작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저는 사업을 즉흥적으로 시작했어요. 남들처럼 거창한 사업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를 바꿔보려고 일을 한 것도 아니에요. 어쩌다가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는데, 재취업을 하느냐, 내 일을 하느냐를 결정해야 하는 시기였고. 그게 30대 중반쯤이었어요. 아마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던 시점이었던 것 같아요.
구멍가게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판매하는 품목이 적고, 봄, 가을 중에는 아무것도 안 파는 기간도 있어서예요. 사실 특별한 콘셉트나 운영 방식은 없어요.
어렸을 때부터 과일을 좋아했어요. 살면서 하루도 집에 과일이 없는 날이 없었을 만큼요. 그리고 원래는 제주도로 귀촌을 하려고 했었어요. 농산물과 상관없이 삶의 거주지를 옮기려고 알아보고 있었고. 과일에 대한 지식은 별로 없지만 향유했던 사람으로서, 팔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제주도 감귤을 소개받아서 한번 (판매) 해보면 어떨까 하는 심정으로 시도해본 게 여기까지 왔어요.
홈페이지를 구경하다가 ‘상식을 지킨다’는 말이 눈에 띄었는데요. 어떤 의미인가요?
사이트 리뉴얼하면서 공씨아저씨네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걸 찾았어요. ‘상식적인 과일가게’.
제가 귀촌을 고민했을 때 제 삶에서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계속 고민했었어요. 한 단어로 표현하면 저는 ‘상식’이라고 설명해요. 제가 원하는 세상이 뭐냐고 물으면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라고 말씀드려요. 가장 쉬우면서도 어려운 단어가 상식인 것 같아요. 사람에 따라서 상식의 기준이 다를 수도 있고. 어쨌든 저는 일과 삶이 하나인 가치를 추구했던 것 같아요.
전혀 다른 분야에 있다가 이쪽으로 오니까, 제 눈에는 상식적이지 않은 이상한 일들이 눈에 많이 띄었어요. 모든 농산물이 마찬가지인데, 과일만 얘기하면, 등급을 나누기 위한 선별 과정을 거쳐요. 과일 가격을 나누는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를 봤더니, 딱 두 가지였어요. 크기와 모양.
우리나라 과일 시장은 무조건 커야 가격이 높아요. 맛이 없어도 커야 해요. 작고 맛있는 과일과 크고 맛없는 과일을 비교하면 당연히 큰 과일이 더 비싸요. 모양은 색깔과도 관련이 있는데 색도, 모양도 예뻐야 시장에서 잘 먹혀요. 조금 못생기거나 색이 영 아닌 것들은 가격이 낮죠. 맛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냐를 따져봤을 때는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이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게 불편한 거예요, 스스로.
그래서 제가 파는 과일은 크기와 모양, 색에 따른 등급을 없애자고 생각했고요. 물론 100% 해결한 과일은 아직 없어요. 현실적인 벽에 부딪혀서요. (공씨아저씨네의) 대부분의 과일은 혼합 과로 판매를 하는 이유가 등급을 없애기 위해서예요. 크고 예쁘든, 작고 못생겼든, 다 섞어서 그냥 하나의 상품으로 판매를 시작했어요.
B급 사과 이야기도 읽어봤는데, 비슷한 사례일까요?
‘B급 사과’ 콘텐츠가 인터뷰나 기사로 나간 후에는 저희를 B급 과일을 판매하는 가게로 인식하고 연락이 오는 경우가 있어요. 제가 원래 하려던 일은 'B급'이라는 말 자체를 없애는 것이었어요.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A, B처럼 텍스트로 라벨링 되는 순간 평균과 등급이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B라고 명명되는 순간, 이 친구는 이미 B인 거예요. B일 필요는 없는데 어쩔 수 없이 되어 버린 거죠. 어떤 곳은 B라는 용어 자체를 없애버리고 ‘못난이’로 쓰기도 해요. 이마트에서는 ‘보조개 사과’처럼 긍정적인 워딩으로 마케팅하기도 하고요.
저는 기본적으로 모양처럼 외형적인 부분에 대해서 워딩을 만들고, 마케팅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봐요. 실제로 요즘 B급 농산물로만 마케팅해서 판매하는 업체가 몇 군데 있는데, 본질을 건드리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어요. 그래서 불편하죠. 비슷한 마케팅이 농민들에게 더 도움이 되고, 사회 혁신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실질적으로는 현실을 더 악화시키고 있다고 보거든요. 본질적으로 해결이 안 되죠. 제가 당시에 B급 사과라고 판매했던 이유는 그 이슈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려고 기획했던 것이고요. 그 이후에는 가능하면 그런 말이나 기획을 없애려고 하죠.
상품을 온라인으로 판매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쓰레기 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고민을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석진님에게 '환경'은 오래전부터 관심 있는 주제였습니다. 개인 혹은 규모가 작은 판매처에서는 개선할 수 있는 범위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바꿀 수 있는 것은 개선하고,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계신다고 합니다. (쓰레기 문제에 대한 더 진한 고민은 이곳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회원 관리도 엄격히 하시고, 원칙이 굉장히 탄탄하다고 생각해요. 창업할 때부터 생각하셨나요?
생각은 항상 하고 있는데,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요. 사이트 리뉴얼하면서 비주얼 부분에서 조금 더 드러났을 뿐이에요. 원칙, 또는 상식이라는 게, 사실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거든요. 과일로 치면 잘 익었을 때 수확을 하면 과일이 맛있을 수밖에 없고. 크기와 모양으로 차별하지 않는 게 저는 상식이라고 생각해요. 그 원칙대로 판매했던 거예요.
현재 유통구조에서는 정상적인 방식은 아니죠. 왜냐하면 이 등급 기준으로 농산물을 판매하는 데가 없으니까요. 초창기에는 모양이 제멋대로고, 크기도 제각각인 것 때문에 컴플레인이 많이 들어왔었어요.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 회원 가입 단계에서 ‘우리는 이러이러한 곳이다’라고 설명을 해야겠다는 필요가 생겼어요.
시작할 때와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이 계속 구멍가게로 남아있는 이유기도 해요. 비즈니스적으로 커지려면 규모를 늘리는 일을 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원래 취지에서 벗어나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어요. 상황이 되면 점차 (규모를) 늘릴 마음은 있는데, 저 스스로가 불편한 일은 잘 못해요. 스스로 용납이 안 되는 일들이요.
이런 원칙에 따라서 일도 똑같이 하고 있어요. 변화하는 게 더 우스운 걸 수도 있죠. 원칙과 상식은 여기 늘 있는데, 뭔가 보이기 위해서 말장난하는 거지 바뀌는 것은 사실 없거든요.
회사의 성장이나 매출에 대한 욕구 등이 당연히 있을 것 같은데,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규모 확장이나 직원 채용 계획을 고려하고 계시나요?
저도 궁금한데요. (웃음)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한 일이 아니에요. 귀촌하기 위해서 먹고살 거리를 찾다가 이 규모로 자리를 잡은 것이어서요.
요즘 이런 고민은 하죠. 젊은 세대가 워낙 취업이 안된다는 소리를 많이 하니까, 그들의 고용 창출을 위해서라도 직원을 뽑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직원 한 명을 채용했을 때 어느 정도의 매출을 더 내야 하는지 숫자로 명확하게 나오거든요. 그 매출을 채울 수 있을지에 제가 확답을 못 내리고 있는 거죠. 그렇다고 대출을 받아서 빚을 안고 채용을 해야 하는 부분인가에 대한 고민도 있고요. 직원 채용은 가장 고민이기는 해요.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찾아보려고 하고, 현재 진행형인 것 같아요.
그렇다면 3년 정도가 지나도 규모가 커질 일은 없을까요?
10년 후에도 없어요. 전혀 없어요. 최종 목표라고 하면 지금의 3배 정도, 직원 3~4명 정도가 저의 최대 규모예요. 그 친구들 급여 걱정 없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수준일 것 같아요. 그 이상은 가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제가 이 일을 하게 된 이유가, 스트레스를 안 받는 일을 하고 싶어서예요. 사업이 커지면 스트레스를 안 받을 수는 없거든요. 그게 가장 커요. 물론 돈을 (더 많이) 벌 방법은 있어요. 하지만 동시에 스트레스가 커지는 거예요. 그래서 의도적으로 안 하는 것도 있어요.
일하면서 처음 3년은 은행 대출로 살았어요. '3년 후에도 또 대출을 받아야 하면 과감히 포기하자'고 시작했는데, 다행히 3년 지나고 나서 플러스가 나서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어요. 그 시기에 생각이 좀 많았죠. 욕심도, 자존심도 내려놨고. 정신적으로 편안해지는 과정을 겪었던 것 같거든요. 이제는 누가 옆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업을 확장했다고 해도 전혀 부럽지 않고, 그냥 제 패턴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겠더라고요.
원래 사진 관련 일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원래는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고요. 학위는 없지만, 사진을 복수 전공했어요. 사실 신방과보다 사진학과 학점을 더 많이 들었고. 졸업하고도 사진 쪽 일을 했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취미로 사진을 찍으셔서 관심은 있었어요. 아주 옛날에는 그냥 취미로, 동호회 가서 책 보고, 사람들 얘기를 귀동냥으로 듣고 사진을 배웠고요.
군대 갔다 와서 학문으로서의 사진을 한 번쯤 공부해보고 싶다는 그 욕구 하나로 전공하게 됐어요. 사진작가 되겠다는 생각은 일절 없었고요. 오로지 사진학을 정식으로 배워보고 싶었던 거고, 마침 학교에 사진학과가 있었어요. 캠퍼스가 달라서 양 캠퍼스를 오가면서 생활했었죠. (와, 대단하시다!) 대단하죠? (웃음) 제 인생에서 제일 바빴던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쉴 시간이 없었고. 하루에 두 캠퍼스에서 수업이 있었던 날도 있었고. 사진학과가 다 실기 위주라서 늘 과제에 치여 살았죠.
커리어의 방향을 바꾼 후에 미련이나 후회는 없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사진 쪽에서 일하는 것에 미련이 없어져서 과감히 포기했어요. 과일 장사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됐을 때는 부수입 때문에 사진 아르바이트를 계속 하긴 했었죠. 그런데 두 가지를 동시에 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 죽도 밥도 안될 것 같아서 사진 일은 끊었어요. 지금도 사진 일이 들어오기는 해요. 다 고사하고 있죠.
주변에 안타까워하는 분들도 계시는데요. 지금 하는 일이 사진을 찍고, 글을 쓰고, 생각을 전달하는 게 중요한 부분이라서, 오히려 그 경험으로 지금 일을 더 잘할 수 있게 된 밑바탕이 된 것 같아요. 그래서 그만둔 것에 대해 아쉬움은 없어요.
앞서 말씀하신 '스트레스 없는 삶'을 생각했던 것은 그전에는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컸기 때문인가요? 예전의 삶과 비교했을 때 어떤 방식이 더 좋으신가요?
컸죠. 귀촌을 결심했던 이유도 (돈을) 덜 벌더라도 심적으로 편안한 삶을 살고 싶어서예요. 지금도 외부 사업 제안은 많이 들어오는데, 딱 봐서 '저거 하면 한 3년은 빨리 죽겠구나' 싶은 일은 안 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서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고, 그렇게 살기 싫은 것 때문에 그래요. 창업 후 첫 3년 동안에도 제가 싫고, 아니다 싶었던 일은 안 하고 버텼거든요. 누가 보면 무책임한 가장일 수도 있었던 상황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텼던 게 지금의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저는 사실 사업하려던 생각이 요만큼도 없던 사람이에요. 마음 편한 2인자가 꿈이었어요. 사장이 될 생각은 없었거든요. 지금의 삶의 방식이 훨씬 더 마음에 들고요. 가족들도 아마 느낄 것 같아요.
결혼해서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완전 워커홀릭이었어요. 주 7일 근무하면서도 전혀 불만이 없었어요. 일이 워낙 좋아서. 아이가 생기니까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삶에 조금 변화를 줘야겠다 싶어서 금요일에 퇴근하면 전화기 처박아두고 아예 보지 않는 연습도 했고. 지금도 주말에는 일부러 전화기를 잘 안 봐요.
간혹 (삶의 방식을) 전환하는 타이밍이 너무 빠른 거 아니냐고 걱정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사실 가장인 사람의 나이로 봤을 땐 한창 미친 듯이 일해야 하는 시기이거든요. 근데 그 시기를 여유롭게 보내고 있는 거죠. 아이들하고 시간을 많이 보내려고 의도적으로 더 노력하는 부분도 있어요. 평일에 갑자기 2시쯤 집에 들어가서 애들하고 농구도 하고요.
아이들이 무척 좋아할 것 같아요.
좋아할 거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고 있는데 결과는 두고 봐야 할 것 같아요. 얘네들이 성인이 됐을 때, 어린 시절의 경험들이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건지는 현재 진행형이잖아요. 물론 어렸을 때 부모와 시간을 많이 보낸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좋다는 의견은 많지만, 결과물이 아직 안 나온 상태기 때문에 (웃음) 그렇게 믿고 하려고 노력하죠. 좋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아버지와 사춘기 시절에 시간을 많이 못 보내서 아직 어색한 부분이 있어요. 그래서 애들한테 조금 더 신경 쓰는 것 같아요.
지금부터 5~6년만 지나면 고등학생이 되어 있을 거고, 그때 되면 제가 굳이 뭘 해주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되잖아요. 일은 그때 열심히 하면 되지 않을까. (웃음) 되게 고민이 컸죠, 사실. 한창 돈을 벌어야 할 시기에 돈을 포기하고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에 대한 고민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하는 거죠. 정답은 없잖아요. 그리고 아이들이 아기였을 때는 놀아주는 거였지만, 어느 정도 큰 다음부터는 같이 노는 상황이 되니까. 저도 덜 힘든 거죠. 지금은 저도 부담도 없고, 운동하면 건강도 좋아지니까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거 같아요.
평소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공공일호 코워킹 스페이스에는 어떻게 들어오게 되셨나요? 공공일호 생활은 괜찮으신가요?
그동안은 독립된 공간을 찾고 있었거든요. 제가 성격이 활발하거나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고, 조용한 곳에서 혼자 일하는 게 편해요. 제가 공유 오피스에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개인적으로 공간이 주는 분위기를 되게 중요하게 생각해서, 어떤 동네, 어떤 공간인지가 사무실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었어요. 그동안 알아보고는 있었지만, 마음에 드는 데가 한 군데도 없었어요.
어쩌다 입주사 모집 공고를 보고, 위치가 대학로라 고민을 좀 했었어요. 대학로는 제가 심리적으로 편안하게 생각했던 곳이었거든요. 처음 미팅을 했던 곳, 그리고 지금 와이프를 만난 곳이 대학로예요. ‘그냥 한번 보기나 하자’고 왔었는데, 지금 제 자리를 딱 보니 ‘저 자리가 나를 위해서 비어있구나’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고민도 안 하고 입주를 결정했어요.
제 느낌에는 다른 코워킹 스페이스는 시끄럽고, 산만하고, 공중에 붕 떠 있는 느낌이었는데, 여기는 굉장히 차분하고 조용하더라고요. 이 정도 분위기면 괜찮겠다고 생각해서 들어왔고, 창가로 들어오는 햇빛이 마음에 들었어요. 홀린 듯이 결정한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도 신기해요. 처음엔 잘 인식하지 못했는데 건물 이름이 공공일호잖아요. 회사 이름도, 제 성씨도 공 씨라 어떤 분들은 저한테 건물 샀냐고 물어보기도 하세요. (웃음) 뭔가 자꾸 인연이었을까 하는 느낌도 드네요.
들어와서도 만족하고 있어요. 건물 자체는 층고가 낮고 작은데, 있을 건 다 있고, 곳곳에 숨통을 트일만한 공간이 있어요. 제 정서랑은 잘 맞는 것 같아요.
코워킹 스페이스 생활에 대해 브런치에 재미있는 글을 여러 개 쓰셨는데요. 처음에는 별명 문화*에 대해 충격을 많이 받으셨잖아요. 요새는 어떠신가요?
지금도 별명 문화의 어색함은 느끼고 있고요. 처음에 ‘님’이라는 호칭을 들었을 때 정말로 숨고 싶었어요. (웃음) 어떻게 보면 ‘저 젊은 친구가 나한테 왜 저런 호칭을 쓰지?’ 하는 느낌도 100% 없지는 않았던 것 같고. 되게 복잡 미묘한 느낌이 드는 거예요. 'ㅇㅇ님'이라는 호칭을 쓰는 것이 직급이나 거리감을 없애고, 평등한 인간관계를 강조하면서 등장했다는 것은 알았지만요. 또 님 자 자체는 익숙한 호칭이잖아요. 그런데 저희 세대는 경험이 없어서 그런지 처음에는 되게 놀랐어요. 실제로 친구들이나 조금 더 윗세대와 얘기해보면, 시도는 했는데 실패한 케이스도 많더라고요. 오히려 더 관계가 악화하는 경우도 있고. 여기는 자연스럽게 쓰니까 어느 순간에는 그냥 필터링 없이 듣게 되는 것 같아요.
* 공공그라운드, 거꾸로캠퍼스 등 공공일호에서 생활하는 몇몇 회사는 이름 대신 별명을 사용합니다. 공공일호 사람들은 서로 호칭 대신 이름 뒤에 '님'자를 붙여 소통하고 있습니다.
세대 간 갈등이나 관계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요. 평소에 농사펀드의 젊은 직원분들과도 아주 가깝게 지내시고요. 특별한 노하우가 있으신가요?
음, 어떻게 보면 그 친구들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예전에 수유동에서 농사펀드와 사무실을 공유했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때 같이 근무했던 친구들이 저한테는 편한 업계 후배예요. 친하게 지내면서 어쩔 수 없이 그 세대의 얘기, 고민을 듣다가 (세대 갈등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죠.
제가 제 또래들하고만 지냈으면 발견하지 못했을 것도 알게 됐고. '저 세대는 저런 게 고민일 수 있구나' 싶기도 해요. 내 인식에 따라서도 많은 게 달라질 수 있겠구나, 싶어서 물어보기도 해요. 신조어 같은 거 쓰면 ‘이거 무슨 뜻이야?’ 이렇게. (웃음) 저한테는 젊은 세대들과 소통할 수 있는 선생님이기도 하죠. ‘이런 상황이 있는데 이렇게 하면 어떨까?’하면서 의견을 구하기도 하고, 조언을 주기도 하고요. 그래서 재밌어요. 농사펀드 친구들하고 얘기하는 것 자체가 저한테는 즐거운 경험이에요.
석진님이 워낙 잘 들어주셔서 좋은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것 같네요.
제가 40대 중반을 바라보고 있는데, 애매한 나이인 것 같아요. 빠르면 벌써 꼰대가 됐거나, 꼰대 진행형이죠. 이때 제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문 기사에서 보니까 ‘밥 조공’을 하는 마지막 세대라고 표현하던데, 상사가 밥 먹자고 했을 때 당연히 '네' 하고 당연히 밥 먹어야 하는 세대예요. ‘밥 먹자’ 했을 때 젊은 친구들은 약속이 있거나 싫으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얘기하는데, 저희 세대는 그걸 거절할 수 없는 마지막 세대라고 하길래 공감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갈등 상황을 조금 바꾸려면 저희 세대에서 변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사실 노력을 해야 하겠더라고요. 가끔은 뭘 물어보기가 창피하기도 하지만, 그런 걸 떨쳐내고 의견을 구하고, 물어보면 오히려 편하게 얘기할 수 있어요. 실제로 얘기해보면 기사화된 세대 갈등의 원인이 굉장히 작은 데서 출발했고, 편하게 바꿀 수 있는 부분인데 그저 갈등으로만 몰고 가는 부분도 많은 것 같아요.
낯설고 어색한 문화를 피하기보다는 먼저 손을 내밀려는 석진님의 태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세대 갈등에 관해 이야기 나눌 때는 제 모습을 되돌아보기도 했고요. 상식과 원칙을 지키는 곳이,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기를 기대해봅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