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사는 세상
만약 당신이 친구를 사귀고 싶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0대가 아닌 30대 중후반의 여성이라면...
아이의 친구가 아닌 나의 친구를 만들고 싶었다.
미국에서 7년을 공부했지만 보스턴에서만 살았던 나는 엘에이에 친구가 거의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딱 한 명 있었다. 그 친구 또한 보스턴에서 공부하면서 알고 지내던 아이였다.
그녀는 내가 사는 곳과 꽤 거리가 있는 곳에 살았고, 자신의 삶을 멋지게 개척해나가느라 바쁜 삶을 살고 있었다. 자기 일에 몰두하는 친구에게 공적인 일이 아닌 사적인 일로 시간을 내어달라고 조르는 건 해서는 안될 행동이었다. 친구사이에 그럴 수 있지 않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민폐를 끼치기 싫어하는 나에게는 쉽게 용납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친구의 삶에 도움을 못 될 망정 해가 되기 싫었다.
그렇다고 친구 없이 살 수는 없었다. 물론 나에게 가장 친한 친구인 남편이 있었지만, 커피 마시면서 2-3시간 수다는 남편에게 큰 무리였다. 이제 막 이사 온 동네에 대해 궁금한 것도 많았고, 그들과 어울려 취미활동도 하고 싶었다. 단독 주택에 살고 있어서인지 다들 문을 나와 차만 타고 이동을 하는지 길 지나다니는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길 가는 사람보고 말을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 동네 마트에 가서 아무나 붙잡고 '친구 하실래요?' 이럴 수도 없었다. (한국에서 '도를 아시나요?'와 다를 게 없잖아..;))
그래서 생각해 낸 게 운동이었다.
어렸을 때 운동을 해서인지 운동에는 자신이 있었고 함께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좀 더 빨리, 쉽게 친해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괜찮아 보이는 운동 수업을 찾기 시작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데 있어서 겁이 많은 쫄보라 나의 결정이 옳은 결정인지 수도 없이 생각했다. 물론 친구가 되어 잘되면 좋겠지만, 새로운 사람에게 상처 받을까 봐 두려웠다. 못 먹어도 고라고, 나는 코어와 근육을 강화시켜주는 발레수업을 신청했다.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 얼마나 다양한 사람이 있을까, 수업을 잘 따라갈 수 있을까..
두려움과 기대감을 안고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첫 수업에 들어갔다.
와우!! 아시아인은 나 혼자였다. (보통은 그렇지 않다.)
하필 그 날 그 시간에 나 혼자 아시아인이라니.. 다양한 인종이 사는 엘에이에..
그 날은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발레수업 날이었고, 나는 그 수업에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무언가 굉장히 낯설었다. 하지만 수업이 시작되자 우리는 운동으로서 하나가 되었다.
수업에 2-3번 참여했을 때쯤 누군가 나에게 시선을 건넸다. 그녀와 눈빛이 마주쳤을 때, 나도 모르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내가 먼저 인사를 해야 하나? 그녀가 인사를 먼저 할까? 인사를 하고 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심장이 순식간 빠르게 뛰었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게 먼저 말을 걸었다.
"Hello(안녕)"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그녀가 하게 될 대답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라는 생각에 머리가 복잡했다.
그런데... 그녀는 정말 상상도 못 하는 예상 밖에 반응을 보였다.
"Do you have a child (애 있어요)?"
아니, 보통 사람이라면 "hello"라고 말하면 "hi" 또는 "hello" 하고 대답하지 않나!?! 아니면, "안녕, 내 이름은 뭐야." 이러는 게 정상 아닌가!?! 당황스러웠고 기가 막혔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No(아니요)"라고 답했다. 그녀는 나의 대답에 아무 말 없이 눈길을 거두었다.
'나랑 장난해? 애 없는 게 죄는 아니잖아. 나는 이제 막 결혼했다고!!'
친구를 사귀고 싶어서 간 클래스에 아이러니하게 애가 없어 대화에 낄 수없다니..
생각할수록 너무 웃기고 어이가 없었다.
'그래. 운동 와서 사교 활동할 생각하지 말고 운동에 집중하라는 하늘의 계시는구나. 그냥 운동이나 하자. '
나는 그 날부터 친구 프로젝트 대신 건강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수업 시작 전후로 들리는 그녀들의 대화 속에 왜 아이의 유무를 물어봤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엿들은 게 아니라 내 귀까지 들렸다. 들리는 소리를 막을 필요는 없으니까..) 그들의 이야기 주제는 그녀 자신이 아닌 아이들이었다. 대부분이 교육에 관한 것이었다. 한국 엄마들의 유별한 자식 사랑에서 시작된 남다른 교육열은 세계 최강이라 생각했지만, 여기서 그녀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한국 엄마들의 교육열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운동 수업에서의 그녀들은 더 열정적이었고, 더 보수적이었고, 더 깐깐했다.
어느 학교를 다니는지, 어느 유치원을 다니는지에 따라 엄마들의 레벨이 달라졌다.
월요일이면 주말에 어떤 야외활동을 했는지 꼭 질문들이 오가고, 방과 후에는 어떤 과외활동을 하는지, 어떤 선생님과 하는지에 대해 정보를 수집하기 바빴다. 방학이 다가오자 방학 때는 어느 여름 캠프를 보내는지, 어떤 수업을 따로 듣는지 알아내야만 했고, 정보들을 얻기 위해 엄마들은 참으로 상냥했다. 정보를 가진 엄마는 여왕이었고, 다들 자신의 핸드폰에 그녀의 전화번호를 저장하기 바빴다. 그녀들의 기싸움에 아직 애가 없는 게 감사하게 느껴졌다.
내가 아직 아이가 없어서 그들의 행동들이 쉽게 와 닿지 않은 걸까?
나도 자식이 있다면 저럴까?
아니면 더 비굴할까?
나는 엘에이는 좀 다를 거라 생각했었다.
날씨도 너무 좋고, 바닷가는 옆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고, 전 세계의 영화와 대중음악의 중심지이지 아닌가...
그래서 아이를 키우고 교육하는 데 있어서도 자유로울 줄 알았다.
하지만 엄마의 마음은 전 세계가 똑같나 보다.
내가 정보를 얻지 못해 우리 아이가 뒤쳐지면 어떡하나 고민하고, 내 아이가 좀 더 좋은 교육을 받고 자라기를 희망하는 것. 그래서 나보다는 나은 삶을 살았으면 하는 것.
친구 만들자고 운동 와서 인생을 배우는 기분이다.
30대 중후반에 되면 오롯이 나를 위한 친구는 만들기 힘들다는 사실,
아이가 있으면 친구를 만들기 쉽다는 사실,
24시간 온통 아이 생각뿐인 그들에게 "아이 있어요?"는 "hello"라는 사실,
또한 그들에게 "아이 있어요?"라는 말은 함께 대화하자는 사실,
처음에 불편하고 불쾌했던 그 질문이 이제는 충분히 이해가 된다.
내가 엄마가 된다면 나도 처음 만난 그녀에게 저렇게 물어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