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 김지영
경기도의 재개발 예정지구, 버스에서 내려 좁은 언덕길을 따라 달려가는 작은 소녀가 있다. 8살 김지영은 작은 책가방을 메고, 꽃무늬 실내화 주머니를 손에 쥐고 끊임없이 발을 내디딘다. 그 길은 가파르고 힘겨웠지만, 소녀는 웃음을 잃지 않고 달린다. 언덕을 넘어 넓은 마당이 보인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오냐! 우리 지영이. 인사도 잘하네!” 마당을 쓸던 할아버지가 반갑게 웃어 준다.
지영은 쉬지 않고 달려 외양간 앞에 앉아있는 소를 지난다. “누렁소야, 안녕!” 지영을 알아본 듯 누렁소는 고개를 들어 “음머어~” 화답한다.
마침내 언덕 꼭대기에 도착한 지영은 회색 슬레이트 지붕을 가진 시멘트 집 앞에 선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소녀는 힘차게 현관 문을 열고 외친다. 문은 나무로 된 간소한 문이다.
지영의 힘찬 인사에도 집 안은 조용하다.
익숙한 석유 냄새가 코를 찌르는 부엌을 지나, 그녀는 빠르게 신발을 벗고 작은 방문을 열었다.
“순영아, 언니 왔어!” 그녀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구석에서 인형을 안고 놀고 있는 순영.
“뭐 하고 있었어?” 지영이 물었다.
“인형놀이.” 순영은 대답하며 인형을 바닥에 툭 내려놓았다. “근데 언니, 나 너무 배고파.”
지영은 가방을 대충 던져놓고 부엌으로 간다.
양은 냄비에 물이 끓기 시작하자, “순영아, 컵라면 껍질은 내가 깔게. 너는 숟가락과 젓가락 준비해!” 지영은 빠르게 명령하며 물이 끓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지영은 끊인 물을 국자로 떠서 컵라면에 부었다.
순영은 묵묵히 서랍을 열어 숟가락을 꺼내고, 작은 목소리로 덧붙인다. “이제 됐어?”
“아니, 조금만 더 기다려. 익혀야 돼.” 지영은 책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언제 익어? 빨리 먹고 싶다.” 순영이 재촉하자,
지영은 책을 한 권 더 올리며, “이렇게 하면 좀 더 빨리 익을 거야!”라며 웃었다.
시간이 흘러 컵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던 순간, 두 자매는 그 기다림의 지루함을 함께 나눈다.
“언니! 이제 먹어도 돼?” 순영이 조급해하며 묻는다.
“어디 한번 볼까?” 지영은 컵라면 뚜껑을 열어 젓가락으로 덜 풀어진 면을 찔러보았다. 아직 딱딱하다.
“엉덩이로 깔아볼까? 더 무거우니까 빨리 익을지도 몰라!”
지영은 순영과 함께 장난스러운 웃음을 터뜨리며 컵라면 위에 엉덩이를 살짝 얹는다. 순영도 언니를 따라 컵라면에 엉덩이를 대고 앉는다. 그 순간, 뿌지직! 하며 컵라면의 스티로폼 컵이 찌그러진다.
“앗, 뜨거!”
뜨거운 국물이 쏟아져 나오자 순영은 벌떡 일어난다. 바지가 라면 국물에 젖어버렸다.
“아… 못 먹겠네.”
순영은 바닥에 쪼그려 앉으며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뜨거운 엉덩이보다 못 먹게 된 라면이 더 아쉽다.
“아하하, 망했네! 망했어!”
지영은 웃으며 순영을 바라본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그 웃음은 그 어떤 고통도 잊게 만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해가 지기 시작하자, 지영과 순영은 마음이 불안해 진다.
“엄마가 올 시간이야! 빨리 치워야 돼!” 지영은 순영을 재촉하며 서둘렀다.
그런데 오늘따라 시간이 빨리 흐른 것처럼, 겨우 방 정리를 시작하려는 찰나, 문이 열리며 엄마가 들어온다.
“이게 뭐야? 집이 엉망이잖아!” 엄마의 목소리가 커졌다.
지영은 하루 종일 기다리던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그 말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순영이 바지는 이게 뭐야? 지영아, 너 도대체 뭐한 거야? 왜 이렇게 엉망이야?” 엄마의 꾸중이 시작되자, 지영은 두려움에 떨며 말을 이었다. “엄마, 잘못했어요…”
하지만 엄마의 화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파리채를 들고 방안을 돌아다니며 지영을 쫓았다.
“이건 또 누가 쏟아 놓은 거야? 누가 이렇게 했어?” 엄마는 파리채로 지영을 때리며 소리쳤다.
“잘못했어요! 엄마! 다시는 안 그럴게요!” 지영은 눈물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엄마의 분노는 누그러지지 않는다. 순영은 슬며시 뒤로 물러서서 조용히 장난감을 정리한다.
“언니가 되가지고, 모범을 보여야지. 허구한날 사고나 치고 말이야. 동생 잘 돌보고, 엄마 오기 전에 방은 치워 놓으라고 했는데, 이게 뭐야?”
“엄마, 지금 막 치우려고 했었는데요, 엄마가 생각보다 빨리 와서 아직 다 못 치운 거예요! 진짜에요!”
“김지영, 너, 거짓말 하지 마! 넌 맨날 그 핑계야. 집안 꼴이 맨날 이게 뭐니? 이리 안 와? 발 딛을 틈이 없네! 틈이 없어! 밥 먹을 자리도 없잖아! 김지영! 넌 이제 2학년인데, 하루 종일 이 조금한 방 하나를 못 치우냐? 언제까지 엄마가 잔소리를 해야 되는 거야, 도대체!”
지영의 반성에도, 변명에도, 도망침에도 엄마의 화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목소리 톤은 점점 더 높아진다. 늘 그렇듯 엄마는 서랍장 위에서 파리채를 집어들고 지영에게 휘두른다.
“찰싹!”
“아얏, 엄마,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렇게요.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지영은 비명을 지르며 작은 단칸방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파리채를 피하려 했지만, 엄마의 분노는 거칠어졌고, 도망갈 곳은 없었다.
“너 맨날 말로만 잘못했다고, 다시는 안 그런다고 하지! 내일 또 이럴거잖아! 안 그래? 넌 어떻게 맞아야만 말을 듣냐?”
“잘못했어요! 엄마! 진짜 다시는 안 그럴게요!” 지영은 눈물을 글썽이며 두 손을 모아 쉴세 없이 빌지만, 엄마의 매질은 더욱 세차게 계속된다.
마침내, 지영은 이 방의 유일한 피난처인 피아노 다리 밑으로 도망쳐 숨지만, 엄마는 포기하지 않고 그 뒤를 쫓아온다.
“너 이리 와! 이리 빨리 안나와!!”
엄마는 파리채로 피아노 다리 사이를 휘두르며 외쳤다. 지영은 최대한 몸을 움츠리며 두 손을 모아 울부짖는다. “잘못했어요, 엄마. 용서해 주세요. 제발.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그 순간, 지영은 파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