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중환자실 앞 벤치에 앉아 무한 대기 모드에 돌입했다. 먹이를 물어줄 어미 새를 기다리는 아기 새 마냥 담당의가 새로운 소식을 전달해 주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다리 사이로 떨군 머리를 두 손으로 움켜쥐는 것과 한 번씩 간호사를 호출해서 아내가 괜찮은지 확인하는 정도였다. 아직 병이 어느 정도 심각한지 알 수 없으니, 어디까지 각오해야 하는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갑갑해하거나 막막해할 틈도 없었다.
이따금 침상에 누운 채로 검사를 받으러 실려 나갈 때 아내의 상태를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기본적으로 온몸의 통증으로 인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으며 몸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간호사들이 배려해 줘서 나는 잠깐동안 아내에게 격려의 말만 겨우 건넬 수 있었다. 아내는 아픈 건지 들리지 않는 건지 내 말들에 반응을 거의 하지 못했고, 환자용 엘리베이터가 도착하면 침상에 누운 채 간호사들에게 이끌려 엘리베이터 문 뒤로 사라졌다. 아내가 괜찮아졌다고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검사를 여러 번 거친 아내가 중환자실로 들어간 이후에 다시 덩그러니 중환자실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너무 더워져서 입을 수 없게 된 코트와 어젯밤 아내가 입원하면서 입고 온 외투가 한데 뒤엉켜 나를 더욱더 심란하게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마스크를 쓴 장인어른이 예고 없이 찾아왔다. 장인어른은 원체 말씀이 없는 사람이다. 한 번씩 ‘애들은 이렇게 키워야 한다.’, ‘원래 이렇게 하는 거다.’ 정도의 당신이 옳다고 믿는 사회 통념과 관습들에 대한 이야기만 할 뿐, 우리에 대해서 크게 간섭하거나 궁금해하는 게 없는 분이다. 그래도 장인어른이라면 사위와 술은 한 잔씩 해야 한다고 믿었던 건지, 사위도 당신도 술이 약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식사하러 가면 맥주나 막걸리를 꺼내오셔서 한 잔 기울이자고 권하셨다. 내가 매번 갖은 핑계를 대서 거절해서 거의 마신 적은 없지만, 장인어른은 사위 앞에서 근엄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아내와 장인어른은 둘 다 살가운 성향들이 아니고 평소 상호 간에 대화가 거의 없어서 가까운 사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장모님과 아내에게 전해 들은 말을 종합해 보면 장인어른은 아내가 어렸을 때부터 세상이 보는 옳은 것만 말했지, 아내가 옳다는 말은 그다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장인어른은 병원으로 찾아오긴 했으나, 내 앞에서도 역시나 특별한 말은 없었다. 참다가 정말로 물어봐야겠다 싶어서 한 장인어른의 질문들에 나는 명쾌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나와 비슷한 답답함이었을 것이다. 왜 아픈지, 어떻게 하면 나을지, 검사 결과는 언제 나오는지, 나왔다면 어땠는지. 사실 나도 답을 애타게 찾고 있던 질문들이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장인어른이 급습하고 나서 말을 걸어왔을 때, 나는 장인어른의 눈을 거의 쳐다보지 못했다. 나도 답답하고 무서운데 내게 이런저런 대답을 요구하니까 견디기 힘들었다. 여유를 잃은 탓에 그런 질문을 내게 굳이 하는 게 이기적으로 보였다. 물론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지 않았지만 나의 답답함도 좀 이해해 달라며 다양한 몸짓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런 내 마음을 장인어른도 읽었는지, 한동안 우리 둘은 나란히 앉아서 앞에 있는 물리치료실을 드나드는 사람들만 하염없이 쳐다봤다. 내 안의 불안감도 감당할 자신이 없는 탓에 다른 사람의 평온을 찾아줄 여유는 없었다. 그 순간 사위의 의무는 충족할 자신이 없었고, 그저 혼자 있고 싶었다.
한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 장인어른은 참을 만큼 참은 건지 다시금 내게 이것저것 물어왔다. 함께 한참을 앉아 있었으니 아무 일이 없었다는 걸 뻔히 알면서 내게 똑같은 질문을 하는 게 이제는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나는 장인어른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나도 너무 불안하고 무서운 상황이고, 우리는 똑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이니 날 가만히 놔둬 달라’는 말투와 뉘앙스를 잔뜩 풍길 준비를 하며 고개를 힘 있게 들었다. 그러나 나는 잊고 있었다. 오늘 처음으로 장인어른의 두 눈을 제대로 응시했을 때, 내가 10년 넘게 봐온 그에게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눈동자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의 장인어른이기 한참 전부터 그는 아내의 아버지였고, 중환자실에 고통스러워하며 누워있는 사람이 바로 그의 딸이었다. 내가 외면했던 그의 공허한 눈동자는 무언의 절규를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딸 괜찮은 거지? 안 죽는 거지? 살려낼 수 있는 거지?’
그는 분명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한 번도 말한 적 없었지만, 내게는 분명히 들렸다.
감정 표현에 서툴고 사회적 통념에 갇혀 당신의 자리에서 응당해야 하는 말들만 입 밖으로 내뱉던 장인어른은 사실 눈으로는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들을 간절히 외쳤던 것이다. 마스크 뒤로 아내가 빼닮은 코와 입을 숨긴 채로 내가 여태껏 봐온 장인어른의 표정 중에서 가장 복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혼자 있고 싶다고 여겼던 마음이 거꾸로 위로해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물론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지만 나라도 위로해 줘야겠다 싶었다. 나도 우리 딸의 아빠인 것처럼 장인어른도 아내의 아버지라는 것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나는 잊고 있었던 사위의 본분으로 돌아와서 ‘집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드릴게요.’라고 말하려고 했던 나의 원래 생각을 삼킨 채 함께 기다려보자며, 별일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있어 보자며, 책임질 수 없는 거짓말들만 잔뜩 늘어놨다.
아내가 중환자실에 들어간 지 3시간 정도 됐던 오후 5시쯤, 담당의가 나를 헐레벌떡 찾아왔다. 근전도 검사에서 뇌신경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고 원내 다른 신경과 의사들의 의견을 구했는데 비슷한 의견이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5일간 투약되는 면역 글로불린이라는 약물이 사용된다고 했다. 원인과 방법을 찾았으니 한숨 놓였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의사들은 희망적인 이야기만 하기보다는 최악의 경우까지 늘어놓기 일쑤인데 우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필요한 약물이 밝혀졌으니 해결될 거로 생각했던 나의 알량한 마음을 비웃으며 정신 차리라고 하듯 의사는 뒷이야기를 잊지 않았다.
우선, 5일간 투약되는 면역 글로불린이라는 약은 효과를 보는데 최대 2주까지 걸릴 수 있다고 했다. 아내의 고통이 2주까지 연장될 거라는 말처럼 들려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약효를 확인하는 게 그렇게까지 오래 걸린다는 점에 큰 문제가 있었다. 약효가 드는 것을 확인한다는 것은 약이 무조건 든다는 게 아니라 들 수도 있고 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효과가 없으면 도대체 어떻게 된단 말인가. 30초 전에 가벼워졌던 마음이 순식간에 다시 불안감으로 요동치기 시작할 때 담당의는 내 마음속 질문에 잔인하게 답변해 줬다. 만약 약이 안 들고 병세가 더욱 악화되면 호흡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했다. 자가 호흡이 불가능해지면 인공호흡기, 최악의 상황에는 기도 삽관까지 필요하고 이럴 경우, 리툭시맙(Rituximab)이라는 약이 추가로 투여되어야 한다고 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점입가경이다. 도대체 어디까지 문제란 말인가. 리툭시맙은 M병원과 같은 2차 병원에서는 취급할 수 없고 대학 병원급의 병원을 가야 된다고 했다. 어제 하루 종일 나를 피했던 대학 병원을 도대체 어떤 수로 찾아가란 말인가. 눈앞이 깜깜했다. 우선 담당의에게 다시 한번 강력하게 전원을 요청했다. 안 그래도 알아보고 있는데 아내를 받아주겠다는 곳이 없다는 눈치였다. 담당의는 자기도 전원을 최대한 알아봐 줄 테지만 일단 아내가 최악의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는 입장을 전달하고 우리와 헤어졌다.
뉴스에 나오던 의료진 파업이 결국 우리 가족에게 위기를 가져올 수도 있는 상황이 됐다. 하지만, 노여워하고 원망만 할 수 없었다. 분노해서 상황이 바뀔 것 같으면 원하는 만큼 분개했겠지만, 그런다고 상황이 바뀌지 않기에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하기로 했다. 내가 아내의 보호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했지만, 우리 딸의 아빠로서의 역할도 놓칠 수 없었다. 당연히 아내의 상황이 훨씬 절박하지만, 딸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빠짐없이 해주고 싶었다. 중환자실 앞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안고 집으로 향했다. 그래도 원인이 어느 정도 밝혀졌고 투여되어야 할 약이 분명해졌다는 사실에 대한 희망과 함께 전원이 필요할 때, 세상이 전원을 허용해 줄지에 대한 절망감과 두려움이 공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