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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색무취 Aug 17. 2024

2-4. Plan B

아내의 정확한 병명에 대한 파악이 전혀 안 된 우리 가족은 아내가 이른 오후까지 보인 증상들을 기반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인들을 조심스레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각종 업무와 대응을 하는 나를 대신해서 장모님이 주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서 여기저기 통화했다. 그러던 중 장모님은 X병원의 감사직을 역임하고 있는 사람을 소개받았다. 그 사람 말로는 어떻게든 본인이 있는 병원의 응급실로 들어오면 자기가 어떻게든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본인이 해줄 수 있는 행위는 정확히 명시하지 않은 채 그저 응급실로 넘어오라고 권유하고 있었다. 넘어오는 방법에 대한 지식이나 안내도 전혀 없었다. 분명히 아내가 중환자실에 있다는 사실을 들었을 텐데 응급실로 옮겨오라는 게 의아했지만, 도와주겠다는 사람의 도움을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어 보였다. 심지어 X병원이라면 갈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가고 싶었다. 장모님에게 아내의 주된 증상을 손발 저림으로 들은 감사는 해당 증상들을 보는 X병원의 교수를 추천해 줬고 외래를 잡고 어떻게든 오라는 말만 지속적으로 반복했다. 그가 그 외에 하는 말은 전혀 없었다.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외래 일정 앞당기는 일이라고 하니 다른 일은 해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심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교수의 외래 일정을 알아보니 가장 빠른 일정은 약 열흘 후였다. 그 외래 일정도 실제 예약 가능 일자와 상관없이 감사가 약속을 지켜서 우리의 외래 예약을 어떻게든 당겨준다는 가정하의 일정이었다. 만약에 그 날짜에 예약이 안 되면 훗날의 날짜에 예약이 될 텐데, 외래 진료가 너무 지연되는 것은 아닌지 참으로 걱정스러워졌다. 그리고 중환자실에 있는 아내가 열흘 뒤에 진료받는 게 현 상황에서 바람직한가? 과연 감사는 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이며, 만약에 안 된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건가? 내가 어제오늘 가졌던 물음과 걱정들에 대한 해답은 듣지 못한 채로 질문들만 늘어갔다.


장모님에게 내가 갖고 있는 걱정과 우려를 감사한테 전달해 달라고 부탁드렸는데, 돌아오는 답변은 변함이 없었다. 어떻게든 외래를 잡고 응급실로 들어오기만 하면 된다는 말만 반복했다. 점점 의구심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제부터 인근의 3차 병원들로부터 계속 퇴짜를 맞아온 나로서는 이 기회를 마다할 심적인 여유가 없었다. 장모님에게 아내의 외래 예약을 부탁하였고, 나는 담당의에게 X병원으로 전원에 대해서 상의하기로 마음먹었다.


담당의는 외래 진료 중이었고, 나는 무작정 간호사에게 담당의랑 잠깐 논의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일정을 잡아주겠다고 해서 잠시 담당의가 있는 방 앞에 앉아서 기다렸다. 잠시 기다리면서 외래 진료를 받으러 온 주위의 환자들을 살펴봤더니 평균 연령이 높아 보였다. 아내가 왜 아픈지 모르겠지만, 유사한 병에 걸리는 사람들보다 훨씬 젊은것은 분명했다. 아내가 운이 없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이들보다 훨씬 젊은데 아픈 거면 병세가 훨씬 더 심각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퍼뜩 들었다. 최근에 들은 이야기 중에 암 환자가 젊을수록 병세의 진행도 빠르고 회복이 될 경우, 회복도 그만큼 빠르다는 게 생각났다. 그런 점에 비춰보면 아내가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회복도 더 빨리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걸어봤다. 무식하고 무지하다 보니 상상만 늘어갔다.


예상했던 것보다 내 차례는 빨리 왔다. 들어가서 아내의 상황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봤다. 결론은 뇌신경 쪽 문제인 것은 맞는데, 정확한 원인을 알려면 검사 결과들이 나와야 했다. 정밀 MRI를 비롯한 오전에 추출했던 척수액에 대한 검사 결과가 나와야 한다는 뜻인 것 같았다. 기본적인 상담을 마친 후에 나는 조심스레 가장 중요한 전원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보호자로서 전원 얘기를 꺼내기 전에 깊은 고민을 해야 했다. 전원 요청을 하게 되면 지금 있는 병원과 지금 받는 의료 서비스가 불만족스럽다는 말로 들릴까 봐 걱정됐다. M병원에 계속 있게 될 수도 있을 텐데, 굳이 밉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담당의는 시원시원했다. 오히려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자기가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살면서 한 번도 전원이라는 것을 고려해 본 적 없는 나로서는 오늘 초면인 사람이 이렇게까지 흔쾌히 도와주는 것이 고마웠다. 우리 부부나 담당의나 상호 간에 의료 서비스 제공자 및 이용자가 되기를 합의한 적이 없다. 담당의 입장에서는 아침에 출근했더니 지난밤사이에 골치 아픈 환자가 한 명 늘어나서 일거리만 많아졌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당연히 직업상 해야 하는 일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직업윤리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탑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면 무척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담당의에게 X병원에 아는 사람이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중환자실에서 응급실로 가도 되는 건지 물어봤더니, 담당의는 무조건 중환자실로 가야 돼서 전원을 받는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준비가 돼야 하고 병원 쪽이랑 협의가 돼야 전원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런 게 아니라면 본인이 알아보는 전원을 기다려달라고 했다.


나는 의사와의 면담을 마치고 다시 장모님에게 전화드렸다. X병원 쪽에서 중환자실 확보를 해줄 수 있는지 물어봐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쪽에서 하는 말은 여전히 동일했다. X병원 감사가 녹음 파일을 틀어놓고 끊임없이 틀어줬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똑같은 이야기만 반복했다. 계속해서 다른 질문들을 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어떻게든 X병원 응급실로 들어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장모님도 계속 똑같은 말만 듣고 전달을 해주고 있어서 결국 내가 직접 통화해 보겠다며 전화번호를 받았다. X병원 감사는 내게도 똑같은 말만 반복했다. 장모님의 지인이라서 예의 있게 대하려고 마음을 굳게 먹고 통화에 임했는데, 몇 분간 통화하고 나서 느끼게 된 것은 딱 두 가지였다.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외래 진료를 앞당겨 줄 수 있다고 말하는 것밖에 없다는 것과 이 사람은 진정으로 우리를 도울 생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 가족의 안위보다는 본인의 권력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 훨씬 크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기 위해서 허우적대고 있는 우리를 상대로 본인의 권력을 적극 과시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우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던 우리 가족을 향해 누군가 던진 밧줄이 사실은 썩은 동아줄이었다.


내 입장에서는 중환자실에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아내를 X병원 감사의 말만 믿고 퇴원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내가 퇴원을 요구한다고 해서 M병원이 아내와 같은 상황의 환자에 대한 중환자실 퇴원을 간단하게 허용하지 않았을 테다. 결정적으로 X병원 감사에게 무엇을 약속해 줄 수 있는지 물어봤을 때 그는 아무런 답변을 하지 못했다. 결국 본인이 직접 해줄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없었다. 오로지 본인의 지위를 이용해서 남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과 가능성을 가지고 우리에게 조아림을 요구한 것이다. 심지어 내일은 주말인데 응급실에 갔다가 중환자실에 들어가지 못하면 어떡하냐고 물어봤더니 그 역시 뾰족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저 응급실로만 오면 자기가 모든 걸 것을 해주겠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뇌고 있었다. 전원이 필요하면 M병원 의사한테 요청하면 되는데 뭘 망설이냐는 듯한 말투였다. 아무것도 약속해 주지 못하는 사람의 말만 믿고 중환자실에 있는 아내를 강제 퇴원시키는 선택은 절대로 고려조차 할 수 없는 옵션이었다.


정말로 아내의 건강과 안녕을 걱정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무책임한 발언들을 계속 반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아내의 고통으로부터 비롯되는 우리 가족의 걱정은 그에게는 권력을 과시할 기회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사람이란 참 간사하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X병원 감사의 목소리에서는 아내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은 통화에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유일하게 긍정적인 답변을 줬던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지킬 수 없는 약속은 당연히 하지 않았던 반면, 이 사람은 환자와 보호자들에 대한 공감과 걱정 없이 오로지 자기 권력 과시만을 목적으로 아내의 고통을 이용하여 허황된 약속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도움을 받기 힘들 거라는 허탈함과 우리 가족을 위한 진심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순간 화가 났다. 그래도 분노를 꾹꾹 눌서 참기 위해 애쓰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 더 이상 장모님에게 희망 고문을 가하지 않을 것 같아서 단호하게 일러주고는 전화를 끊었다.


“결국 저희를 위해서 약속해 주실 수 있는 것도 전혀 없는 것 같은데, 아내를 중환자실에서 강제 퇴원시키는 것은 보호자 입장에서 절대로 택할 수 없다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전화 끊겠습니다.”


내가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선에서 나의 실망감과 우리 가족의 간절함으로 장난친 사람에 대한 분노를 전달할 수 있는 말들이었다. 결국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한 시간에 남의 위기를 자기 과시의 기회로 삼으려고 하는 사람과 신경전 하느라 시간 낭비만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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