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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색무취 Aug 15. 2024

2-3. Plan B

지하 1층 매점에 도착했을 때, 의료용품을 파는 곳은 잠겨 있었고, 음료수와 아이스크림을 파는 냉장고와 냉동고에만 접근할 수 있었다. 아내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살 수 없게 된 나는 다른 구매처를 찾아야 하는 건가, 다시 연다고 한 가게가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가 고민했다. 기저귀를 사는 게 늦어지면 아내에게 피해가 가는 것은 아닐까.


특별히 날이 따뜻해진 것도 아닌데 늦은 점심을 먹고 후식을 즐기러 온 병원 직원들로 추정되는 네댓 명 정도가 냉동고 앞에 서서 깔깔거리며 아이스크림값 내기를 하고 있었다. 나랑 같은 공간에서 이렇게도 온도 차가 큰 사람들이 있다는 게 참 묘했다. 나는 병원에 오면 괜스레 스산해지고 위축되는데, 이들에게는 그냥 일터구나. 아내가 이렇게까지 아픈 것은 내게 엄청 특별하고 위중한 일인데, 이들에게는 매일 보는 수많은 환자 중 하나일 뿐이구나. 아내의 고통이 중요한 사람은 나뿐이라고 생각하니 괜히 씁쓸해졌다. 아내와 나의 이토록 괴로운 하루도 그들에게는 그저 평범한 하루일 뿐이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 연락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게 우선이었다. 장모님.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해야 할 분인데, 도무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딸이 중환자실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 부모의 마음이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도 걱정하며 기다리고 있을 테니 짧게 용건만 말하기로 했다. 최대한 덤덤하게 아내가 중환자실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했다. 병원에서 들은 얘기들을 기억나는 대로 전달하고, 또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겠다며 통화를 최대한 빨리 끊었다. 길게 대화할 자신도 정신도 없었다. 엄마한테도 전화했다. 어제부터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고, 필요하면 서울로 와줘야 할 것 같으니 5분 대기조를 부탁했다. 엄마는 잠깐 간호사 생활을 했던 터라 친구 중에 최근까지 간호사 생활을 하셨던 분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최근 서울 소재의 대학 병원에서 수간호사로 근무했었기에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걸어봤다.


엄마랑 통화를 끝내고 잠시 뒤에 감사하게도 엄마의 친구가 먼저 전화를 걸어주었다. 상황 설명을 대략하고 혹시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조심스레 물어봤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의료진이 파업한 상태에서 은퇴하신 전직 간호사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은 사실상 없었다. 절망스러워지려던 찰나에 그나마 내게 위안이 된 점은 그래도 이렇게 엉망인 상황 속에서도 운 좋게 병원은 잘 찾아갔다고 해준 것이다. 어차피 대학 병원들은 전공의들이 대부분 빠져나간 상황이니 차라리 의료진이 정상적으로 근무하고 있는 M병원과 같은 병원에 입원하고 치료를 받고 있다는 게 다행이고, 그보다 더 다행인 것은 우연히 입원하게 된 M병원이 뇌 질환 전문병원이라는 것이다. 이 부근에서는 그래도 제일 낫다는 얘기를 들어 혹시나 병원을 옮겨야 할지 고민되는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내 마음이 절박해지다 보니 이렇게 작은 것들에도 감사하게 었다.


그 사이에 문을 연 매점에 들러서 필요한 물건들을 구매하여 중환자실에 전달해 주러 올라갔다. 당연하게도 이때부터 중환자실 출입은 통제됐다. 용건이 있으면 중환자실 앞에서 아내의 담당 간호사를 호출하여 이것저것 물어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갑자기 시간이 많아지니 몇 시간 동안 못 했던 걱정들이 자석에 쇳가루가 달라붙듯 순식간에 빨려 들어왔다. 아내의 몸 상태에 대한 걱정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걱정들도 비로소 들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병원에 있어야 하는지, 른 사람의 도움 없이 내가 아내를 케어할 수 있는 건지, 딸은 누가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부터 당장 오늘 밤에 있을 딸과 Y의 파자마 파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내의 건강과 생사만 걱정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할 일이 갑자기 많아졌고 예고 없이 부여된 역할들이 무궁무진하게 늘어났다. 공석이 된 딸의 엄마 자리부터 환자의 보호자, 가족들의 안내자, 아내 지인들의 소통 창구 등 수많은 역할이 생겼다. 슬슬 압박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내는 당연히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없으므로 내가 아내 대신 아내의 지인들에게 연락을 취해야 했다. S네 가족과 만나려고 몇 달 전부터 애써서 겨우 내일 만나기로 시간을 맞췄었다. 하지만 24시간을 남겨놓고 안타깝게도 취소 통보를 해야 했다. 다행히 아내 폰의 잠금 해제 방법을 알고 있어서 아내의 향후 일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달력을 살펴보니 아내와 내가 함께 알고 있는 T랑 다음 주 월요일 점심에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이 또한 취소해야 한다. 아내는 이 약속들을 지킬 수 없는 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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