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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색무취 Aug 14. 2024

2-2. Plan B

현실 자각이 전혀 되지 않아 혼란스러웠던 나는 의사로부터 이상한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조급함과 침착함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면 이런 모습일까. 심각한 소식을 전혀 기대하고 있지 않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던 내게 의사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 의사는 내게 최대한 친절하게 설명하기는 했지만, 나는 그 설명들을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다. 기나긴 설명이 끝났을 때 내가 겨우 이해한 것은 아내는 아침부터 매우 고통스러워했고, 몸의 통제력을 잃어가기 시작했으며, 조금 전에 척수액을 뽑았으나 압력이 부족해서 검사를 위해 필요한 척수액이 충분히 추출되지 못했다는 것 정도였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에는 호흡이 문제가 될 수 있으니 그럴 경우에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기 위해 중환자실을 가야 한다고 했다.


중환자실. 그저께 밤에 회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나랑 멀쩡하게 대화한 사람이 가야 할 곳이라는 게 전혀 실감 나지 않았다. 회식이긴 했지만, 최근에 계속 컨디션이 좋지 않아 술은 마시지 않았다고 했다. 비록 머리가 아파서 타이레놀을 먹긴 했지만, 대화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그래도 전문가가 와서 그렇다고 하니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담당의는 신경과 소속 의사였다. 뿌리 염색 타이밍을 놓쳤는지 정수리 쪽 일부 모근이 희끗희끗했다. 그 약간의 흰머리가 오히려 내게 신뢰감을 심어줬다. 일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분이라 미용실 예약을 못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중환자실에 들어가는 아내도 어떻게든 낫게 해주지 않을까. 그렇지만, 내가 이분을 믿든 안 믿든 간에 기다려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곧 중환자실로 옮길 준비를 할 거고 검사 결과들이 얼른 나오기를 기다릴 거라고 하고는 담당의는 사라졌다.


M병원의 본관에서 아내의 병실이 있던 신관으로 넘어가는 복도는 약간의 내리막길로 되어 있었다. 중환자실 이동 통보를 받은 나는 그 내리막의 복도 한가운데에 서서 아내가 누워있는 병실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명히 아침부터 아내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했고, 중환자실까지 가야 한다고 했었는데, 특별한 조치를 취하러 아내의 병실로 들어가는 의료진은 특별히 보이지 않았다.


나는 원래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다. 어렸을 때부터 주위 사람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빠르게 파악해서 그들의 필요나 욕구를 아무도 모르게 맞춰주기 위해서 노력해 왔다. 누군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 기분이 풀리게 하기 위해서 다양한 시도를 했었고, 싫어할 만한 행동이 있다 싶으면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다. 남들이 말하지 않은 것들도 지켜주려고 애쓰는 나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직접 말로 요청한 행동들이나 말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주고 존중해줘야 하는 것이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이런 행동들이 다 주위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믿고 살아왔는데, 결국 나를 위한 행동과 에너지 소모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주위 사람들이 기분 좋아 보이지 않으면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던 것을 최근에 깨달았다. 격한 에너지 소모까지 해가며 남들이 웃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 용썼던 일들은 사실은 남들의 행복과는 관계가 없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아니면 느끼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나를 위한 행동들이었고, 오히려 주위 사람들에게 나의 편안함을 위해서 일정한 행동들을 강요하는 꼴이 됐다.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삶이었던가.


이렇듯 갈등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상대방이 화내거나 언짢아할까 걱정되어 행동을 주저하게 되는 나도 중환자실 얘기를 들으니 결국 보호자 출입 금지인 병실로 밀고 들어가게 됐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길래 중환자실로 들어가는 것인지 내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오자마자 담당의의 얘기를 듣느라 아내의 상태를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 아내가 입원한 병실은 간호·간병 통합시스템이라 원칙적으로는 보호자가 병실에 출입할 수 없지만 내 기준에서의 민폐를 무릅쓰고 병실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는 병상에 누워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아내가 육성으로 ‘너무 아프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온몸을 뒤틀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장희빈이 인현왕후의 죽음을 저주하기 위해 사용했던 주술 인형처럼 누군가 아내의 주술 인형을 제작해서 바늘로 마구마구 찌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그 저주는 주효하고 있었다. 엑소시즘이 필요한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내게 그런 능력은 없었다.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지만, 아내의 몸은 지배당한 상태라서 나는 그저 지켜보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주위의 다른 환자들도 다 같이 아내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관여할 수 없는 옆집의 부부싸움 구경하듯이 숨죽이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몸은 자기 침상에 있지만 시선은 모두 아내를 향하고 있었다. 아내가 이렇게 아파하는데 그 어느 누가 이불 하나 덮어주지 않고 있었다. 내가 조치를 취해달라고 단호하게 말했더니 그제야 간호사 2~3명이 붙어서 이불을 덮어주고, 진정시켜 주기 시작했지만, 이미 아내는 다른 사람이 진정하라고 해서 진정될 상태가 아니었다. 병실에 아내 외에 다른 환자들도 5~7명가량 있었기에 아침부터 똑같이 고통스러워했을 아내에게만 매달려있기만 할 순 없었을 테다. 하지만, 다른 환자들은 각자의 힘으로 앉아 있었고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는데, 아내는 몸의 통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잦은 경련을 일으키며 온몸이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내가 한마디 하기 전까지 아무도 아내를 봐주지 않아서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났다. 그래도 내가 한마디 했다고 간호사들은 부랴부랴 아내를 중환자실로 옮길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나는 얼마 되지 않는 아내의 짐을 주섬주섬 챙겼다.


우선, 회사에 연락해야 했다. 호기롭게 다녀오겠다고 한 나는 결국 오늘 회사에 돌아가지 못하는 몸이 됐다. 하지만, 나는 보호자임과 동시에 우리 회사의 직원이기도 했다. 배려는 받고 있었지만, 나도 할 일은 해야 하고 지켜야 하는 선은 지켜야 했다. J형에게 아내의 현 상황을 보고했고, 차도가 있거나 상황에 변동이 있으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회사 상관이기도 했지만, 친구이자 멘토 같은 존재고 동료이기 이전에 동생으로서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게 느껴져서 고맙고 든든했다.


겉옷과 휴대폰 정도가 전부였던 아내의 짐을 챙긴 나는 병원 2층의 중환자실 앞으로 갔다. 어젯밤에 급하게 입원이 결정되는 바람에 아내의 짐은 조촐했다. 그 와중에 내가 눈치 없이 사줬던 휴대폰 충전기가 포장도 뜯기지 않은 채 겉옷 호주머니에 외롭게 쑤셔 넣어져 있었다. TV에서 봤던 모습으로 인해 형성된 내 머릿속 중환자실의 이미지는 병상별로 두꺼운 비닐막 등으로 철저하게 분리되어 있고, 외부인 출입에 대한 통제가 되어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M병원의 중환자실은 내 머릿속 이미지와는 크게 달랐다. 입구만 지나면 약 10~12개의 병상이 양옆으로 나열되어 있었고 침대들 사이를 분리하는 물리적인 장치는 크게 없었다. 대부분의 환자는 고령이었고, 기본적으로 콧줄과 수액을 장착하고 눈을 감고 누워 있어서 조급하고 불안했던 마음에 희한하게도 숙연함까지 생겼다. 아내만 아픈 게 아니었다.


중환자실 입구를 통과해서 서랍장 위에 서류들을 두고 상담이 진행됐다. 사실상 환자들과 분리되지 않은 곳에서 상담이 진행됐고 간호사들이 나름 많은 것들을 설명해 줬는데 거의 혼수 상태에 있는 고령 환자들 사이로 아내의 침상이 배치되고 세팅되는 것을 보느라 대부분의 설명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추가 검사나 치료가 필요할 경우 동의한다는 서명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 같았고 간호사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정신없이 나의 사인을 휘갈겼다. 필요한 행정 절차들을 마친 후에 아내를 잠시 봐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아내 곁으로 다가갔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쓸데없이 힘찬 경련과 발작이 일어나기 시작한 아내의 손을 부드럽지만, 힘 있게 잡아주면서 내 마음이 전달되기를 바라는 것밖에 없었다.


중환자실이었기에 내가 아내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짧았다. 아내는 여전히 고통스러워하고 있어서 신경안정제나 마취제 같은 약물을 써서라도 아내의 고통을 줄여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달라고 부탁하면서 중환자실 앞에 있는 벤치로 나왔다. 실감 나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 의료진 파업 사태를 보면서, ‘이런 시기에는 절대 아프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바로 이 시점에 아내가 이렇게나 아프다. 아직 아내가 왜 아픈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깊게 고민하거나 생각해 볼 시간은 없었다. 우선 중환자실에서 구비해 달라고 했던 기본 물품들을 사러 병원 내의 매점으로 향했다. 휴지, 물티슈, 치약, 칫솔, 물 없이 머리 감는 샴푸, 그리고 기저귀. 중환자실에서 손에 쥐여준 준비물 목록을 보면 아내는 이제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점점 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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