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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송이 Nov 27. 2024

끽해야 백 년 인생, 공기나 하며 놀아보세


정년이 낼모레면 어떠랴

공깃돌 같이 가벼운 인생

오린이,육린이,칠린이  모두 모여 공기  한번 놀아보세


오린이의 동심세계 제5막!


손을 씻는다. 손가락 사이사이 구석구석. 핸드크림을 바른다. 기왕이면 바닥과의 부드러운 마찰력을 위해 손날 아래에 듬뿍. 손마디 관절 스트레칭을 위해  1,2,3,4 5. 1,2,3,4,5... 잘 꺾인다. 이상 없다. 손목도 돌려본다. 오른쪽으로 한번, 왼쪽으로 한번... 부드럽다. 유연하다. 이 정도면  김연아 선수의 점프- 스핀- 스텝 -시퀀스와 같은 한 알- 두 알- 세 알- 네 알- 꺾기, 이 연속 동작들을 무리 없이 해낼 수 있을 것 같다.


자, 오늘 오린이는 공기놀이에 도전한다.

공기놀이, 그 이름 자체에 이미 공기 반, 소리 반이 담겼으니 더 이상 설명해서 무엇하랴. 엄지손톱 크기에 작은 프릴 8개가 너울거린다. 흔들면 쓱쓱쓱. 플라스틱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귀에 나근나근 들려온다. 공기알 소리를 귀에 대면 유년의 추억들이 한꺼번에 소환되는 것 같다.


내가 누구던가. 오줌까지 참아가며 100년 내기 게임을  세 번까지 거뜬히  해내던 내가 아닌가.

장희빈도 뒷걸음칠 포독스런 눈빛과'다 잡아버릴 거야' 하는 매서움으로 공중에 뜬 5알을 살쾡이처럼 움켜쥔  내가 아니던가

 

그러나 세월을 이길 장사 없다고  근 40년 만에 도전하는 공기놀이에 설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게임은 시작되었다.

자, 선수 입장!

선수 1: 포도송이. 놀이터 하나 변변하게 없는 천호동 주택가에서 자라 어쩔 수 없이 방구석 공기놀이로 유년의 쓸쓸함을 극복함. 자칭 공기 신동.

선수 2: 포도송이 남편. 경기도의 자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양친은 논에 들로 나가고 누나 셋은 서울에 일하러 나가 공기놀이로 외로움을 달랬다고 함.

심판 : 친청엄마. 공기놀이 국제심판 자격증은 없지만, 고춧가루 색깔만 봐도 국산과 중국산을 구별할 수 있고, 들깨 참깨 한 알도 본인 눈은 못 속인다는 자칭 매의 눈 소유자.


잠깐, 경기를 시작하기 전 브런치 구독자님께 양해 말씀을 올린다.

공기놀이의 경기장은 마땅히 방바닥이나 거실바닥이 되어야 하지만, 최근 오린이들의 허리와 고관절이  시원치 않아 경기장을 특별히 식탁테이블로 마련하였다. 따라서 이번 경기는 스탠딩으로 치러진다.


사실 며칠 전 연습 경기를 치른 적이 있다. 손가락 기럭지가 덩치에 비해 작고 짧은 남편을 코웃음 치며 상대했다가 태어나 처음으로 완패를 했었다. 그날 나의 실력은 엉망이었다. 손가락은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필살기 꺾기도 5알 실패! 게다가 이놈의 다초점 안경도 문제였다. 돋보기와 근시 기능을 갖고 있는 다초점 렌즈는 바닥과 공중을 재빠르게 왔다 갔다 해야 하는 경기에서는 오히려 안 쓰는 게 나았다. 사물이 커졌다 흐려졌다 울렁증을 유발하였으니, 급기야는 안경도 집어던졌으나 따라잡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경기규칙도 정리했다. 공기놀이 규칙은 전국 팔도가 다르고, 살던 동네마다 다르기 때문에 딱 3가지만 허용했다.

콩 허용~ 이건 진짜 입에서 자동 발사되니 막을 수 없다. 꺾기는 3알 이상 허용~ 원래는 4알 이상으로 하려고 했으나 남편의 아킬레스건이 꺾기라 대승적 차원에서 3알도 된다는 자비를 베풀었다. 그리고 마지막 꺾기는 딱 100알에서 끝낼 것.


100년 내기, 만원 내기다. 자, 경기 시작이다.


남편의 선공이 시작되었다. 남편의 경기 운영 스타일은 성실함에 있다. 한 알 한 알 공기를 잡을 때의 진중함은 주식 매매 스타일과 유사하다. 나는 그냥 내가 끌리는 주식은 그냥 한 번에 사서 폭망 하는 편인데, 남편은 한 주 한 주 조금씩 사서 모으는 편이다. 그래서 비교적 덜 흥하고 덜 망한다. 생각보다 섬세한 면도 있다. 저걸 어떻게 잡지 하는 두 알도 건드리지 않고 살포시 잡아내니 말이다. 여하튼 만만치 않은 상대다.

'제법인데?' 하는 순간..... 꺾기가 또 발목, 아니 손목을 잡는다.


악~~~~ 와!!!!!  동시 탄성

무슨 일이야? 소리에 놀라, 친정 아빠가 2층에서 내려오신다. 구경꾼 한 명 추가.

 

나의 후공도 만만치 않았다. 뭉개진 내 자존심을 회복하리라. 이번 나의 게임 운영 전략은 '성급함' 버리기다. 어려운 고비 한번 넘겼다고, 다음 알을 생각 없이 차르르륵 펼치는 성급함과 아둔함을 버리기로 했다. 매사 신중, 성공했다고 들뜨지 않기다. 출발이 좋다. 10년까지 논스톱으로 달렸으나, 방심하는 순간 세알에서 한 알을 놓치고야 말았다.


내가 토끼라면 남편은 거북이다.  내가 다섯 알을 잡고 10년을 2번에 해내면, 남편은 3알씩 세 번을 해도 9년이다. 그래도 그 기세는 무서웠다. 어느새 야금야금 나를 쫓아왔다.


결국 34년 동점!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안돼, 안돼 침착해야 해. 여기서 지면 왕년에 내 공기 파트너 현아에게 너무 미안하잖아.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때였다.

"진짜 선수는 후반전에 강한 거야"

심판 겸 본 경기의 해설자인 엄마의 즉석 애드리브가 터졌다. 이영표 축구 해설가도  탐낼 만한 멘트다. 그래 난, 선수다. 후반전에 강한 진짜 선수다. 쭉쭉쭉 힘을 낸다.

39, 44, 49, 54성공~  반면 남편은 본인의 아킬레스건인 꺾기에서 번번이 실패다.


92, 97년 그리고 마지막 3알 성공~ 100년이다.

내가 이겼다. 40년 만에 100년 내기의 승자는 내가 되었다. 이 기쁨의 순간, 나는 친구 현아가 생각났다.


"포도송이 승~ "

엄마의 환호성도 이어진다. 사실 오늘 공기놀이에서 가장 신난 우리 엄마였다. 심판석에 앉으라고 하니 순순히 앉고, 기록해 달라니 순순히 기록하고, 가끔 대본에도 없는 인생 명언도 날리시고 오늘 엄마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크게 웃었다.


"축하해"

남편은 패배를 인정했다. 애초 만원에서 천 원을 보태더니 만 천 원을 내밀었다.  애초에 내놓은 내 돈 만원까지 합치니 상금이 천 원이 되었다. 나는 이 상금을 엄마에게 모두 드렸다. 돈을 받은 엄마는 더 크게 웃었다. 겨우 이만 천 원에 저렇게 기뻐하는 걸 보니, 엄마도 영락없이 칠린이었다. 참고로 엄마는 내년에 팔린이가 되신다.


엄마는 현재 갈비뼈 골절 중. 갈비뼈 붙고나면  본인과도 한 판 하자고 하신다. 다음엔 아빠까지 합세하여 부부 대결, 가족오락관 한번 찍어 볼까?


오늘 하루를 초딩 버전으로 일기장에 쓴다면 "참 재밌었다" 이 한마디다. 이 보다 더 재밌다는 것을 표현할 방법이 없다. 오린이의 동심 세계, 아니 칠린이, 팔린이의 동심 세계는 오늘도 행복했다.

(좌)2알 땡이거든? (우)독수리 날기권법 5알 성공!
우리 사위 잘한다!

(좌)두알? 이게 된다고? (우)7번 죽고 100년 살았네



(에필로그) 오린이의 동심 교훈


살살해라,  그러다 관절 나간다

-공기놀이가 소근육 발달에 좋다는 건 어릴 때 얘기다. 나이 들어하면 관절염을 유발할 수 있는 점을 명심하자. 뭐든 과도함은 금물, 내 몸이 해낼 수 있을 만큼만 도전하자.


잘 나간다, 우쭐대지 마라

-30cm 떨어진 두 알 잡았다고 우쭐댔다가는 그냥 주는 세 알도 실패한다. 브런치도 마찬가지 구독자 800명 넘었다고 우쭐대지 마라. 인기 떨어지는 건 한 순간이다.


세알 3번 꺾는 거보다 다섯 알 2번 꺾는 삶을 살자.

-뭐 이건 교훈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번 공기놀이를 할 때 확실히 느꼈다. 깨가 백 번 구르는 것보다 호박이 한번 구르는 게 낫다. 뭔가 할 때 확실히 크게 하자.


조기 교육은 몸이 기억한다.

 -내 친구 딸 은지는 수능 영어를 어릴 때 배운 영어 실력으로 봤다고 했다. 우리 딸 국어 점수는 어릴 때 시작한 독서논술이 밑바탕이었다. 공기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 배운 건 몸이 기억한다.

 

오십, 칠십, 팔십도 즐거운 게 제일이다.

-한바탕 웃고 나니, 스트레스가 쫙 풀렸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딸과 사위가 즐겁게 사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즐거웠던 까닭일까? 그 날밤은 아주 잘 주무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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