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와 역량보다 주민등록번호를 먼저 묻는 당신들에게
회사 좀 다녀본, 아니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평생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가 있습니다.
너 몇 살이야? 몇 년 차야?
이 질문에 대한 대답, 그리고 그 대답이 가져오는 여파는 실로 엄청납니다. 어쩌면 그 사람의 Resume, CV, 경력 기술서 수십 장보다 더 임팩트가 큰 것 같기도 해요.
존댓말이 순간 반말로 바뀌는 것은 기본이고요
다른 자격 조건 다 갖췄어도 단지 나이 많다고 (또는 적다고) 분위기 좋았던 채용이 갑자기 파투 나기도 하고요
이미 실력과 성과 검증은 진작에 끝났는데도 연차 많은 선배님들을 먼저 승진시켜야 해서 한참 기다렸다가 승진되기도 하죠, 반대로 별 뚜렷한 성과가 없어도 그 부서에서 나이 많고 연차가 제일 높다는 이유로 승진을 먼저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죠
때론 어린 직책자가 있는 곳에서는 아무리 적임자여도 연장자인 직원을 받기 부담스러워하고, 또 연장자인 직원은 아무리 좋은 자리가 생겨도 어린 직책자가 상사로 있다면 이동을 껄끄러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요, 정말 이게 맞는 걸까요? 계속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인가요? 나이 먼저 따지고 연차 먼저 따져서 우리가 좋은 것, 얻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요
일단 내가 저 사람보다 나이가 많고 연차가 높으면 더 우위에 서도 된다는 그런 마음가짐, 반대로 내가 나이가 적고 연차가 적으면 일단 뭐가 됐든 간에 한 수 접고 상대를 치켜세워 드려야 한다는 그런 태도. 이런 것들 이 외에 뭐가 있었을까... 커서만 깜빡깜빡 몇 분을 지켜보며 아무리 오래 생각해 봐도 당최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밖에서 그냥 개인적으로 만나서 형 누나 동생 하는 사적인 만남에서야 사실 나이에 따라 서로 위계를 나누든 그냥 친구를 먹든 말든 아무런 상관이 없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누가 딱히 피해볼 것도 이득을 얻을 것도 없으니까요.
회사에서는 어떨까요? 회사의 대부분의 인사 행위에는 각각의 목적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평가는 주어진 일을 얼마만큼 충실하게 달성했는지를 따지기 위함이죠, 그리고 연봉은 그 사람의 역량과 하는 역할에 따른 몸값을 정하는 것이고요, 승진과 보임은 그 사람이 더 많은, 더 높은 직위나 직책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판단하고 새로운 일을 맡기는 행위입니다. 채용과 이동은 그 자리의 역할과 fit이 맞는 최적의 사람을 찾아내는 과정이고.
그런데요 이러한 의사 결정, 판단의 순간에서요, 과연 나이, 연차가 비집고 들어와야할 틈이 있나요? 어느 장면에서요? 이런 것들을 따져 물어야 할 명분과 득실이 진정 있는 것인가요? 사실 우리는 이미 웬만큼 다 알고 경험했다고 생각해요. 나이나 연차가 많다고 해서 혹은 적다고 해서 그것에 따라서 그 사람이 가진 역량이나 성과, 가진 지식과 경험,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이 항상 정비례하지 않다는 것을요.
한번 잠깐만 생각해 봐요
똑같은 일을 5년 내리 했어도, 불과 맡은 지 2년밖에 안된 사람이 그 일을 더 잘했던 적은 없는지
잦은 이직, 그리고 직무 변경으로 뒤늦게 새로운 부서에 전입 온 20년 차 부장님보다, 그 부서에 신입 때부터 들어와서 잔뼈 굵은 5년 차 대리가 오히려 경험과 역량이 더 뛰어난 적은 없는지
사원이 하는 일, 대리가 하는 일, 과장이 하는 일들이 서로 정말로 다르고 난이도가 크게 차이가 나는지
나의 경험, 지식을 나보다 연차 높고 나이가 많은 선배들이 이미 다 알고 경험했었는지, 반대로 나보다 연차 낮고 나이 어린 후배들이 나의 지식과 경험에 결코 밀렸었는지
재밌는 것은 많은 조직, 회사에서는 너무나도 아무렇지도 않게, 이상하리만큼 나이나 연차를 중심에 둔 시스템과 문화를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내가 '나이와 연차를 따지고 있다'라는 자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배고프니 밥이 당긴다' 같은 수준의 자동반사처럼 움직이는 것 같아요. 마치 나이와 연차는 당연히 최우선 고려해야 할 예선전이고, 그 예선전을 통과한 다음에서야 성과든 역량이든 경험들을 본선에서 겨루는 모습이라 할까요.
그러다 보니 유독 한국에서는 이런 타이틀의 기사들을 종종 접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90년대생 젊은 피의 임원의 발탁 승진했다며 화제에 오르기도 하고,
50세 이상 비직책자들만을 대상으로 희망퇴직과 구조조정을 하기도 하고,
xx세에 팀장, xx세 임원을 타깃으로 승진관리와 직원 육성을 하기도 하고,
올해 신임 임원은 평균 나이가 몇 살인지, CEO들은 몇 살인지 조사하여 발표하기도 하죠.
그런데요, 이런 것들이 실제로 무슨 철학이 있고, 어떤 의미와 효과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임원이 임원이 되는 데까지 짧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이뤄낸 뛰어난 성과와 업적보다도, 단지 90년대생이라는 것이 더 주목을 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나이가 50세가 넘었다는 이유로 당연히 구조조정 대상으로 우선 고려되어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인지,
xx세에 팀장이, xx세에 임원이 왜 꼭 되어야 하는지, 그렇게 하면 뭐가 달라지는지,
올해 신임임원의 평균 나이가 44세면 어떻고 50세면 어떻고, 그것이 그 임원이 맡게 될 일의 업무와 성과에 실제로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11년차 직원은 9년차 직원보다 왜 아무이유 없이 연봉이 더 높아도 되는지
십여 년을 지켜보고 있지만 지금은 더더욱 잘 모르겠습니다.
나이 빼고, 연차 안 따지고 그냥 그 사람으로만 볼 수는 없는 것일까요? 나이 따지기가 passive skill이 되어버린 한국 사회에서는 앞으로 영원히 실현불가능한 일일까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면서 회사에서는 왜 그렇게 그 숫자 하나에 절절매야 했었던 걸까요?
몇 년생인지, 입사 몇 년 차인지, 몇 기인지 같은 무의미한 숫자들이 더 이상 우리의 가능성을 제한하지 않을 날,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온 비효율과 불합리의 잣대들이 인사평가 서류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그런 순간을 그립니다.
#연공서열 #조직문화 #인사 #H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