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다
워라밸이라는 말이 유행하던 아주아주 옛날부터 그 단어가 굉장히 이상하고 어색하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언제부터 누가 만들어서 썼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이 말을 처음 사용했던 사람들이 직장이나 일터에서 보내는 시간을 'Work'로, 나머지 여가 시간을 별생각 없이 'Life'라고 불러서 이 말이 굳어진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루 24시간의 1/3, 때로는 1/2 이상 일하는 시간을 인생에서 빼내는 듯한 저 표현은 지금도 잘 와닿지 않아요. 이미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다고 느꼈는지, 하모니라든지 시너지라든지 워라밸을 바꾸려는 시도를 했지만, 이미 고유명사처럼 되어버린 워라밸은 그 자리를 굳건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Life에서 Work를 따로 떼어 보게 만들어 버리는 말의 힘 때문인지
"야근 자주 한다", "밤늦게까지 일 한다."라는 말을 할 때, 우리는 '불쌍하다' 라거나 '안 됐다', '굳이 왜 일을 만드냐', '그 회사 문화가 이상하다'와 같은 부정적인 말을 듣는 경우가 대부분에요.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2010년대 후반 우리나라의 주 52시간제 시행을 기점으로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하는데, 이제는 마치 회사일은 오래 하면 안 되고 오래 했다가는 정말로 큰일 나는 것으로 되어버렸고, 오랜 시간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은 효율적으로 일하지 못하는 사람, 심지어는 미련하게 소처럼 일하는 대명사로 취급하기도 해요.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일하는 시간이 적으면 좋은 회사, 일하는 시간이 많으면 나쁜 회사라는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그런데 과연 정말 그럴까요.
사례 1_회사에 A와 B라는 사람이 있다. 연봉, 직급 등 모든 조건이 동일한 이들에게 똑같이 10만큼의 일이 주어졌다고 가정할 때, A는 8시간 동안 10을 마쳤다. B는 12시간 동안 10을 마쳤다.
A와 B 둘 중 누가 일을 더 잘한 걸까요? 누군가는 A가 B가 12시간 걸려서 할 일을 8시간 만에 해냈으니 A가 더 일을 잘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둘 다 똑같다고 생각해요. 8시간을 했든 12시간을 했든 결국은 10이라는 결과물을 동일하게 만들어냈으니까. 학교에서 12시간 걸려 report를 낸 학생과 8시간 걸려 report를 낸 학생이 똑같이 90점을 받았을 때, 더 빨리 낸 학생보고 더 잘했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A와 B가 회사에서 만들어낸 가치는 사실 똑같거든요.
사례 2_ 이 팀에 같은 직급의 C가 경력 입사했다. 사실 C는 4시간이면 10의 일을 거뜬히 해낼 수 있는 실력을 갖고 있었지만, 회사에서 최소 8시간을 일해야 했기에 4시간 바짝 일하고 나머지 시간들은 한가롭게 딴짓하면서 시간 때우다가 8시간 동안 12만큼의 일을 마친다.
C는 일을 잘하는 사람인가요? 일하다 딴청 피운 것은 문제일까요? C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 맞아요. 그리고 딴짓했다고 비난하기도 애매해요. C는 어쨌든 자신에게 주어진 일보다 무려 20%를 초과로 해냈으니까. 물론 C가 8시간을 정말 열심히 몰입했다면 20만큼(100% 초과)도 했을 수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C가 일을 잘 못했다고 하긴 어렵죠.
사례 3_A가 C의 입사로 자극을 받아 좀 더 일을 많이 해보기로 한다. A는 이제 12시간 동안 13만큼의 일을 마친다.
이제 A와 C 둘 중에서는 누가 일을 더 잘하는 걸까요? A는 12시간 동안 일을 해서 13을 해냈어요 (시간당 1.08). C는 8시간 동안 일을 해서 12를 했어요 (시간당 1.5). C의 업무효율은 A대비 40%나 우수하니 당연히 C가 더 일을 잘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뛰어난 업무효율로 C는 회사 일을 빨리 마치고 본인의 다른 일에 더 시간투자를 많이 할 수 있었어요. A는 비록 C보다 효율은 많이 쳐졌지만 회사 일에 자기의 시간을 더 많이 썼고 C보다 작게나마 더 많은 가치를 만들어냈고요.
노동 시간의 가치를 점점 경시하는 요즘 사회 트렌드에서, C 같은 사람을 소위 '일잘러'로 칭송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고 느낍니다. 빠르게 자기 할 일 미리미리 딱 해놓고, 여가 시간도 풍성하게 즐기는 효율적이고 스마트하고 유능한 직장인. 듣기만 해도 뭔가 멋들어지죠. 그러나 반대로, A 또는 B 같은 사람들은 뭔가 좀 영리하지 못하고 둔하고 비효율적이고, 안타까운 이미지가 생겨버렸죠.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고요. C가 그렇게 일잘딱깔센으로 해서 얻어낸 성과는 결국 누구에게 갈까요? 바로 C입니다. C가 아무리 일을 뛰어나게 빨리, 효율적으로 일을 해낸 들 그가 만들어내는 가치의 총량은 사실 A와 B와 별반 크게 다르진 않아요. C가 일을 빨리 해서 본인의 여가 시간은 늘어났겠지만, 그걸 두고 회사에서 또는 C의 동료들이 일 잘한다 손뼉 쳐줄 일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자기 할 일을 가성비 있게 해낸 것은 맞지만요. 그럼에도 오늘날 다양한 이름을 가진 C들이 여기저기서 일잘러로 불리고 그들의 일 빨리 쳐내는 법, 적은 시간으로 일하는 법과 같은 것들이 꿀팁처럼 소비되는 것이 현실인 것 같아요.
'농업적 근면성', '엉덩이로 일하기'와 같은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로 일하는 데 있어서 진짜 중요한 평가 기준은 얼마나 일했냐가 아니라 일의 양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빨리하는 게 아니라 많이 하는 거요. 일의 질이야 당연하고요. 남이 8시간 동안 할거 2시간 만에 다 했다고 일잘한다고 축하할 일이 아니라고요. 그럼 남은 6시간은 뭐했어? 놀았어? 를 물어봐야죠.
C는 4시간에 10을 할 수 있죠. 8시간이면 20, 12시간이면 30이에요. A가 12시간 동안 기를 써서 13을 할 때, C도 만약 똑같이 12시간 동안 집중했다면 30을 했을 거예요. 10을 시켰는데 30을 해버리는 것 이런 것이 진정한 일잘러가 아닐까요. 8시간에 12 한 거로 만족하고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요. 그건 A보다도 못한 것이잖아요.
굳이 주어진 일보다 더 한다고 내 시간 들여서 일하면 회사만, 남들만 좋은 일 시키는 것 아닌가? 왜 스스로 노예짓을 자처하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월급 루팡은 때로는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이일 저일 다 몰리는 호구는 말 그대로 호구니까. 그런데 봐봐요. 다른 사람이 10만큼 적당히 일할 때 내가 20만큼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나요? 그 사람이 2달 동안 할 경험을 나는 1 달이면 하죠. 2년 경험은 1년 안에 하고요. 2년이면 4년, 5년이면 10년이에요.
연차는 같겠지만 진짜 같은 사람일까요? 똑같이 게임 1년 했어도, 나는 레벨 50이고 상대는 레벨 25로 만나는 거죠. 절대 상대가 안되죠. 그리고 점점 그 차이는 더 벌어질 겁니다. 똑같이 골프 1년 배웠다고 다 같은 score 아니잖아요. 매일 연습장 드나든 영수는 싱글을 오갈 때, 나는 백돌이를 전전하는 것. 왜 그런지 다 알잖아요. 재능차이도 있겠지만 그만큼 더 안쳐서 그런 거죠.
직장인에게 진정한 의미의 워라밸이란 무엇일까요
우리의 삶의 레벨과 수준을 더 높이기 위한 현명한 시간 활용 방식이지, 단순하게 일하는 시간 줄여서 여가 시간 더 늘리자 라는 말은 아닐 것 같아요.
일을 줄이는 직장인, 일을 안 하는 직장인에게 돌아오는 건 결국 퇴화뿐입니다.
#HR #인사 #워라밸 #workandlife #기업문화 #조직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