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에 대한 책임

- 2025년 8월 1일 -

by 최용수

♡ 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1849)
<연습곡 모음집 Op.10 중 3번 '이별의 노래' / Etude Op.10 No.3 ‘Tristesse’>


https://www.youtube.com/watch?v=eLb2oln-siA&list=RDeLb2oln-siA&start_radio=1


인생을 딱 두 단어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나는, '만남'과 '헤어짐'이라고 하겠다.

부모님의 만남으로 나는 이 세상과 만날 수 있었고, 수많은 은사님과 친구들과의 만남으로 내 삶의 인연그물이 짜여졌다.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아내를 만나 이 우주에서 가장 소중한 두 딸을 또 만났고, 회사를 다니면서부터는 어릴 때 만난 그 모든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난 이 세상의 존재이유는 '만남'이라고 믿었다. 항상 새로운 세상은 새로운 만남을 통해 열렸기 때문이다. 어릴 적 친구들, 초·중·고등학교 시절의 은사님들 같이 대개는 헤어지며 잊혀진 이들도 많았지만, 그 헤어짐의 빈 공간은 늘 더 많은 새로운 만남들로 채워졌다. 돌이켜 보면 내 삶은 그 수많은 만남들이 빚어낸 반짝이는 모자이크 같았다.


그런데, 올해 1월 아버지와의 갑작스런 이별은 오직 '만남'으로만 이해되던 이 세계의 맞은편에 '헤어짐'이라는, 딱 '만남'만큼의 그것이 자리 잡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내가 지금껏 '헤어짐'을 자각하지 못했던 이유는 그것이 잠깐의 '단절', 잠깐의 '무관심', 잠깐의 '여백'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어떤 '헤어짐'은 '영원'의 영역으로 떨어져 다시는 '만남'의 세계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것"이라는 자각이 생기기 시작하자 내가 보던 세상의 색(色)이 변하기 시작했다. 화려한 빛으로만 드러났던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모두 그 빛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이면(裏面), 그림자들을 밟고 서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쏜살같이 지나가는 세월을 탓하면서도 그것들이 어떻게 내가 만남으로 일군 세상을 영원의 경계에서 지워가고 있는지 왜 미처 자각하지 못했을까? 오로지 새로운 만남만을 탐해 온 내 욕심 때문이었을까?


어제저녁, 퇴임하는 선배(나와는 몇 년 차이 나지 않는)를 위한 조촐한 송별회가 있었다. 즐거운 추억들과 동병상련의 감정들이 뒤섞여 회식은 묘한 감정으로 마무리되었고, 플래카드에 각자 이별에 대한 소회를 매직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나는 회자정리 거자필반 (會者定離 去者必返)이라고 썼다. 오늘의 이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겠지만, 오늘의 이 기억마저 언젠가 '영원(永遠)'의 망각에 의해 지워지겠지만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도 지금처럼 그 만남에 대한 책임을 다하겠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동안 내가 새로운 만남에 대한 욕망 때문에 그와 똑같은 크기의 '헤어짐'의 세상을 자각하지 못한 게 아니라 그저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부딪혀 오는 인연들을 만나며, 그 만남들 뒤에 서있는 이별에 대한 무게에 대해서도 정성과 책임을 다했는가란 질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게 되면 만남에 더 신중해지는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오늘 아침은 오랜만에 쇼팽의 '이별의 노래'를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쇼팽의 '이별의 노래' 정식 명칭은 <피아노 연습곡 Op.10, 3번>이다. 동양권에서는 ‘이별의 노래’나 ‘이별의 곡’으로 서양에서는 ‘Tristesse(슬픔)’, ‘Farewell(작별)’, ‘L’Adieu(작별인사)’ 등으로 불리고 있으나 이 곡에 담겨 있는 감정은 모두 헤어짐의 슬픔이다.

1832년, 젊은 쇼팽이 폴란드를 떠나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중 고향과 사랑하는 이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쓴 곡이다.


19세기 초 혼란에 빠진 유럽


19세기 초 유럽은 나폴레옹 전쟁(1799~1815)과 프랑스혁명으로 혼돈 그 자체였다. 왕조들은 무너졌고, 국경은 그 경계가 혼란스러워졌으며, 혁명의 불씨는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워털루 전쟁으로 완전히 패배하면서 나폴레옹에게 유린당했던 유럽 4대 열강(오스트리아,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들은 패전국 프랑스와 함께 200여 대표가 오스트리아 빈에 모여 1814~1815년 동안 "전후 유럽의 질서 복구와 영구 평화", 그리고 프랑스혁명 이전의 '회귀'를 목표로 국제회의를 개최하게 되는데 이게 그 유명한 '빈 회의'다.

빈 회의(1815) 결과 폴란드는 러시아에게 거의 대부분의 영토를 뺏기게 되고,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폴란드 서부지역의 영토를 분할 점령하게 된다. 러시아는 차지한 폴란드 땅을 ‘폴란드 입헌왕국’(그냥 ‘폴란드 왕국’으로도 불림)으로 만들지만 실질적으로는 러시아 황제(알렉산드르 1세)가 왕위를 겸임하는, 사실상의 ‘러시아의 위성국’으로 전락해 버린다.

빈 회의 이후 유럽은 자유주의, 민족주의를 억압하는 반동적 분위기가 지배했다. 러시아는 폴란드의 언론·집회·교육의 자유를 제한하고, 친러시아 성향의 관리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애초에 약속했던 자치권을 무력화시켜 버렸다. 정치적 탄압과 검열, 밀정 활동은 갈수록 교묘해졌고, 폴란드의 예술가·지식인들은 이 상황에 좌절하게 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러시아의 탄압은 폴란드 군대의 청년 장교와 대학생들이 비밀결사를 만들어 독립과 개혁을 위한 불씨를 키우게 만든다.


1830년대 혁명 물결과 폴란드에서 일어난 11월 봉기


1830년, 파리에서는 7월 혁명이 일어나 프랑스 왕정이 무너진다. 그리고 이 무렵 벨기에 또한 열강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는 등 유럽에는 새로운 자유의 바람이 불었다. 이에 고무된 폴란드 지식인들과 민중들은 “우리는 언제까지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매여 있어야 하나”라는 자각과 함께 민족주의적 저항의식이 고조되면서 그 해 11월 29일, 바르샤바의 젊은 사관생도들이 러시아의 폭정에 항거하여 ‘11월 봉기’(Powstanie listopadowe)를 일으키게 된다. 시민과 군대가 합세해 봉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폴란드 혁명세력은 임시 정부와 국민군을 조직해 완전한 독립 쟁취를 도모하였다. 하지만, 대규모 러시아군의 투입과 국제사회(특히 빈 체제의 열강)의 소극적 태도로 인해 결국 실패하게 된다.


쇼팽의 망명과정에서 탄생한 '이별의 노래'


당시 바르샤바에서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얻고 있던 젊은 쇼팽은 11월 봉기가 터지기 불과 몇 주 전, 음악가로서의 더 넓은 세계를 꿈꾸며 1830년 11월 2일, 절친 티투스 보이치에호프스키와 함께 친구들과 음악원 교수들의 환송을 받으며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향했다. 본래는 오랜 꿈이었던 이탈리아 유학길에 오르고 싶었지만, 유럽 각지의 정치적 소요 때문에 빈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바르샤바에서 민족의 독립을 위한 거대한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 소식을 들은 쇼팽은 “돌아가서 조국의 고통을 함께하고 싶다”며 귀국하려 하지만, 친구의 만류로 망설이다 결국 귀국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서 고국을 그리며 밤마다 편지를 썼다. 당시 쇼팽의 일기와 편지에는 “내가 떠난 그 순간을 저주한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봉기가 패배로 끝나자 러시아는 지식인들의 폴란드로의 귀환을 막았다. 이 때문에 젊은 쇼팽 또한 다시는 조국의 땅을 밟을 수 없게 되었다. 고국을 잃은 쇼팽은 평생 타국땅에서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운명이 되었다. 그렇게 그의 가슴 한 켠에 품은 조국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이 ‘이별의 노래’를 비롯한 수많은 명곡 속에 깊이 새겨졌다.


'이별의 노래'는 오랜 망명과 타향살이의 외로움 속에서 쇼팽이 자신의 마음을 담아 작곡한 곡으로 이 곡의 멜로디를 그의 제자가 연주할 때, 그는 감정에 북받쳐 “오, 나의 조국!”(O, me patrie!)이라 외치며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까지 남아있는 곡이다. 쇼팽 스스로도 “내가 평생 쓴 것 중 이토록 아름다운 멜로디는 없었다”고 할 정도로 그의 조국에 대한 진심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쇼팽이 이 곡에 대해 따로 '이별의 노래'나 '이별의 슬픔'과 같은 제목을 붙이지는 않았고, 후대 평론가들이 이 곡의 멜로디에 담긴 슬프고 아름다운 멜로디와 이 곡을 쓸 당시의 쇼팽의 심정을 담아 제목을 붙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곡은 1833년 프랑스, 독일, 영국에서 동시에 출판되었으며, 발표 직후부터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를 지닌 에튀드”라고 불리며 음악계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의 에튀드는 주로 건반 기교와 속도를 위한 연습곡이었으나, 이 곡은 느린 템포, 선율 중심의 서정적 아름다움이 돋보여 ‘노래하는 듯한(칸타빌레) 에튀드’, 또는 피아노를 위한 ‘토네 포엠’(음악시)이라 불리기도 했다.
음악비평가 프레데릭 니크스는 “고전적 구성미와 낭만적 향취가 완벽히 어우러진 작품”이라고 평했고, 미국 비평가 제임스 허네커는 “과장되지 않은 건강한 낭만성이 돋보인다”고 극찬한 바 있다.
이 곡은 대중적으로도 큰 사랑을 받아 다양한 드라마, 영화, 대중음악 등에서 자주 편곡·인용되면서 우리에게도 낯익은 곡이기도 하다.

이 곡이 수록된 에튀드(연습곡) 모음곡(Op.10)은 1829~1832년 동안 쇼팽이 작곡한 연습곡들을 모아 1833년에 출판되었다. 모두 12곡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곡이 하나의 피아노 연주 기법(기교)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기계적 연습곡을 넘어서 ‘음악시’라 불릴 만큼 서정성과 예술성이 뛰어난 것이 특징이다.

전곡을 통해 아르페지오, 크로마틱, 옥타브, 여러 손가락 독립, 화성적 감각 등 다양한 테크닉이 아름답고 풍부한 선율에 녹아 있다. 3번 '이별의 노래'와 함께 12번 '혁명'이 특히 자주 무대에서 연주된다.

이 연습곡 모음집은 훗날 ‘피아노 음악의 성경’, ‘연습곡의 혁명’으로 불리며, 리스트, 슈만, 드뷔시, 라흐마니노프 등 후대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연습곡 전곡은 작년에 타개하신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인 마우리치오 폴리니(Maurizio Pollini, 1942~2024)의 연주로 감상해보자.

- https://www.youtube.com/watch?v=VhciLJSLfqc&list=RDVhciLJSLfqc&start_radio=1&t=27s



* 벌써 광복절이 있는 8월이라 모처럼 정완영님의 시조 '조국'을 소개합니다.


조국(祖國)


- 정완영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에인 사랑


손 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 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두 줄은

굽이굽이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鶴)처럼만 여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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