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7월 31일 목요일 -
♡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
〈밤의 가스파르 / Gaspard de la nuit〉
■ https://www.youtube.com/watch?v=5WEB_uMqQyg&list=RD5WEB_uMqQyg&start_radio=1 (1악장, 조성진 연주)
캄차카 반도 인근에서 발생한 진도 8.8의 초강진 소식과 함께 이 지진으로 발생한 쓰나미가 인근 항구도시를 완전히 쓸어버리는 너무 비현실적인 영상... 어젯밤도, 오늘 밤도, 그리고 또 앞으로 일주일 더 찜통더위가 밤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소식...
이 와중에 최근에 발행된 미국 트럼프 정부의 AI 정책보고서가 눈에 띈다.
기사에 소개된 보고서의 내용이 가관이다. 미국이 중국과의 AI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방대한 인공지능 인프라와 이를 뒷받침할 에너지를 공급받는 게 중요한데, 이를 위해 기존 미국의 환경보호법(청정대기법(대기오염 방지), 청정수질법(수질 오염 방지), 환경복원법(일명 Superfund로서 유해물질로 오염된 토지와 환경을 복구하기 위해 조성된 정부 기금)을 대거 손을 봐야 한단다. 지금까지 인공지능을 학습시키기 위해 건설한 데이터 센터들은 대략 100MW(이는 대략 10만 가구가 사용할 수 있는 전력량) 정도로 지어졌지만, 초거대언어모델(LLM)을 학습시키려면 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GW(기가와트) 규모의 데이터센터가 필요하단다.
현재 미국 인디애나주에 아마존이 짓고 있는 데이터센터의 전력량규모는 2.8 기가와트(1GW는 통상 원자력발전소 1기가 생산할 수 있는 양이다)급인데, 2030년까지 7 기가와트로 늘릴 예정이라고 한다.(이런 데이터 센터를 짓겠다는 곳이 아마존만이 아니다.)
이 같은 엄청난 에너지 사용은 인근 지역의 전력망에 심각한 부담을 줄 수 있어 추가적인 발전소 건립이 필수적이다. 즉 기존 미국의 탄소중립 계획은 사실상 무력화될 것이라는 게 환경전문가들의 생각이다. 하필 지난해 트럼프의 대선 공약이 '화석연료로의 역행'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지난밤 찜통더위도 힘들었는데, 이른 아침부터 마치 지구의 종말을 예고하는 듯한 뉴스들이 눈과 귀를 어지럽힌다.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에서 흘러나오는 스산하고 암울한 분위기가 오늘 아침의 종말론적인 뉴스와 잘 어울리는 것 같다. ㅠㅠ
1908년, 파리. 라벨은 친구이자 피아니스트 리카르도 비녜스를 통해 알로이시우스 베르트랑의 몽환적 산문시집 ‘밤의 가스파르’를 접하게 된다. 라벨은 이 시집의 신비롭고 다채로운 환상, 죽음, 악마적 이미지 등에 깊은 인상을 받게 되는데 특히 그중 세 편의 시(‘물의 요정’, ‘교수대’, ‘스카르보’)에서 그는 피아노 음악의 한계를 넘나드는 독창적인 곡의 아이디어를 구상하게 된다.
라벨은 작곡을 시작하면서 ‘발라키레프의 이슬라메이보다 더 어렵게 만들겠다’고 밝혔을 만큼, 의도적으로 피아노 연주의 난이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려 시와 음향적 환상을 결합하려고 했다.
‘이슬라메이’(Islamey: Oriental Fantasy, Op.18)는 1869년 러시아 작곡가 밀리 발라키레프(Mily Balakirev, 1837~1910)가 작곡한 피아노 곡으로 단일 악장의 동양적 환상곡(Oriental Fantasy)으로, 당시는 물론 오늘날까지도 ‘가장 높은 난이도의 피아노 곡’ 중 하나로 여기지는 곡이다.(극악의 연주 난이도로 '피아노의 대악곡(大惡曲)'으로 불리는 곡들로는 쇼팽의 폴로네이즈 '영웅'과 에튀드 '혁명',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과 '라 캄파넬라', 라흐마니노프의 '악흥의 순간' 등이 있는데, 여기에 발라키레프의 '이슬라메이'와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가 추가된 셈이다.)
‘이슬라메이’는 발라키레프가 캅카스 지방을 여행하며 체르케스(Adyghe) 민족의 춤과 음악에 담겨있는 민속 멜로디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한 곡으로 제목의 ‘이슬라메이’는 캅카스 민속 무용에서 따온 이름이다. 동양적이고 화려한 선율, 박진감 넘치는 리듬, 그리고 러시아 민속 색채가 잘 어우러져 있는데 특히 기교적으로는 불꽃이 튀는 듯한 초고속 패시지, 복잡한 폴리리듬, 그리고 전음계적 화성과 연속 아르페지오 등 당시 피아노 연주의 기교를 한계까지 밀어붙였다는 평가를 받는 곡이다.
(호로비츠의 연주로 감상해 보자. 다행히 연주시간은 9분 내외로 길지 않다. - https://www.youtube.com/watch?v=r9yWeSMnpt8)
앞서 쇼팽과 리스트, 그리고 라흐마니노프의 곡들도 그렇지만,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Gaspard de la nuit)가 '극악의 난이도'로 평가받는 이유는 단지 어려운 테크닉 때문만은 아니다. '피아노의 대악곡'들은 모두 피아니스트의 신체적 한계뿐만 아니라 정신적 집중력, 해석적 감수성을 동시에 요구하는 피아니즘의 한계에 대한 도전의 의미가 있다.
'밤의 가스파르'에서 극악의 난이도로 평가받는 부분은 악장별로 다른데, 1악장 ‘물의 요정’에는 물결처럼 이어지는 초고속 아르페지오, 왼손과 오른손이 교차하며 오버랩되는 음형 등은 손가락의 빠른 움직임과 사운드의 투명함을 동시에 살려야 하기 때문에 단순한 기교 이상의 테크닉이 요구된다.
2악장 ‘교수대’에서는 무표정하게 반복되는 한 음(G♭)이 전체 곡 내내 유지되게 하면서 오른손, 왼손이 각기 독립된 선율과 리듬을 동시에 수행하는 ‘손의 완전한 분리’를 필요로 하기에 연주자의 대단한 집중력이 요구된다. 3악장 ‘스카르보’는 라벨이 “이슬라메이보다 더 어렵다”라고 선언한 악장으로 폭발적인 속도, 겹겹의 폴리리듬, 순간적 옥타브 점프, 화려한 글리산도, 급격한 다이내믹 변화가 쉼 없이 쏟아진다. 몇 초 만에 수십 번씩 손 위치를 오가야 하고, 오른손/왼손이 각각 난이도 높은 리듬을 다중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이런 기교들을 바탕으로 라벨이 베르트랑의 시를 통해 표현하고자 한 밤의 꿈과 죽음, 공포, 환상 등의 이미지가 ‘음색과 뉘앙스’로 섬세하게 그려 내야 하기 때문에 뛰어난 피아니스트라고 하더라도 이 곡을 편하게 자신의 레퍼토리로 올려놓지 못한다.
- 1악장 물의 요정(Ondine) : 투명하고 몽환적인 수면 위, 물의 요정이 속삭인다. 그녀는 인간 남성을 유혹하지만 거절당하자 조용히, 그리고 쓸쓸하게 물로 사라진다. 피아노는 아르페지오와 오스티나토, 음영 짙은 화음과 온음계로 물결과 환상의 세계를 구현한다. 최상의 투명함과 절제, 그 속에 깃든 내면의 동요!
- 2악장 교수대(Le Gibet) : 해가 저물고, 먼 곳의 종이 울린다. 교수대에 매달린 시체가 붉게 빛나는 황혼 속에 흔들리고 있다. 반복되는 음형과 장송곡적 선율, 중음의 오스티나토(특정 악구나 음형을 곡 전체 또는 악곡의 일부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기법)는 듣는 이를 음울한 죽음과 고립의 정서로 이끈다. 극도의 정적과 침묵, 고독에 대한 라벨의 ‘음악적 명상’이 느껴진다.
- 3악장 스카르보(Scarbo) : 작고 사악한 밤의 악마, 스카르보가 피아노 위에서 춤춘다. 눈 깜짝할 사이 모습을 감추었다 나타나고, 손가락에 달린 날카로운 손톱이 실크 커튼을 긁는다. 이 악장은 미친 듯한 속도와 변화무쌍한 다이내믹으로 가득하다. 피아니스트들은 스스로 피아노와 함께 그 한계를 시험하며, 최고의 난이도와 음악의 극적 효과에 도전해야 한다.
이렇게 세 악장은 각각 다른 밤의 내밀한 표정을 보여준다.
〈밤의 가스파르〉는 ‘밤의 수호자'로 번역할 수 있는데, 베르트랑의 산문시집 서문에는 가스파르가 ‘밤의 보석상(La bijoutier de la nuit)’—즉, 신비롭고 어두운 세계의 귀중한 것들을 간직한 존재—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라벨은 음악적으로 '밤의 환상과 섬뜩한 비밀을 속삭이는 자'라는 상징으로 해석하고 있어서, 단순하게 '밤의 수호자'라는 의미보다는 ‘밤의 환상과 어둠 속의 이야기꾼’ 혹은 ‘밤의 악령 같은 존재’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흔히 프랑스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드뷔시와 라벨을 이야기하지만, 라벨의 초기작품은 몰라도 중기 이후의 작품들은 인상주의를 넘어, 정제되고 견고한 화음과 음악적 색채들을 바탕으로 고전과 현대를 넘나드는 음악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작품처럼 라벨은 자신의 음악언어로, 시와 소설, 환상과 음향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내가 들려주고 싶은 밤이 있다. 빛보다, 소리보다 더 아득한 공간 속에서 시와 음이 하나가 되어.”
— Maurice Ravel
■ 20세기 초 거장들의 작품들의 해석에 탁월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캐나다 출신의 세계적 피아니스트 마르크-앙드레 아믈랭(Marc-André Hamelin)의 연주로 전곡을 감상해 보자.
- https://www.youtube.com/watch?v=2njejBerYqo&list=RD2njejBerYqo&start_radio=1
♥ 적요(寂寥)의 밤
- 임보
적요의 밤
내 등이 가렵다
히말라야의 어느 설산에
눈사태가 나는가 보다
적요의 밤
귀가 가렵다
남태평양의 어느 무인도에
거센 파도가 이는가 보다
적요의 밤
잠이 오지 않는다
내 은하계의 어느 행성에
오색의 운석들이 떨어지고 있나 보다
적요의 밤
어디선가 밀려오는 향훈…
내가 떠나왔던 아득한 전생의 종루에서
누군가 지금 종을 울리고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