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시인의 ‘사람만이 희망이다.’에 대한 제고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오래된 문장 앞에서
1997년, 시인 박노해는 옥중에서 집필한 글들을 모아 『사람만이 희망이라』를 출판했다. 당시 ‘얼굴 없는 노동 시인’으로만 회자되던 그가 정규 출판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뉴스였다. 저간의 사정을 다 담아낼 수는 없지만, 분명한 변화가 있었다. 그의 시는 대중 앞에 더 서정적인 얼굴로 나타났다. 그런데도 그 이후 그는 더 새로운 방식으로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굴곡진 시대를 사실적 언어로 붙잡고, 그 현실을 건너려는 의지 또한 지금까지도 여전하다.
생전에 故 김수환 추기경(1922~2009)이 그를 두고 “외부를 향한 외침에서 내면의 자기와의 투쟁으로 이동한 겸손한 존재”라 평했다는 말은, 바로 그 전환의 질감을 짚어준다. 나 역시 그 변화가 궁금했다. 그래서 어느 날, 내 기준에서 대표적이라 할 만한 시 두 편을 골라 천천히 읽었다. 하나는 「다시」, 다른 하나는 「변화 속에서」였다.
다시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은 사람은
그 자신의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변화 속에서
사람은 세월이 쌓여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잃을 때 늙어가는 것이다.
이상도 하나의 생명이라서 계속 성장시키지 않으면 죽고 만다.
이 중 「변화 속에서」는 두어 구절의 시 문장 뒤에 시인의 감회가 덧붙어 있다.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가
세월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거친 세월이 흘러도
늘 푸른 소나무처럼
변함없는 사람은
변한 세월만큼
변화의 빠름과 크기만큼
치열한 자기 변화를 이루어내서
결코 변해서는 안 될 것을
굳건히 지켜가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그가 천착한 시어는 다름 아닌 ‘변화’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변화에도 민감해졌을지 모른다. 그런데 나는 이 시와 그의 감상을 읽으며 한 특별한 구절에서 야누스의 감정을 경험했다. “사람은 세월이 쌓여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잃을 때 늙어간다”라는 구절이 그렇다. 한편으로는 삶을 관조하는 깊이에서 오는 감동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변화’를 ‘세월’과 ‘꿈’으로 치환해 스스로를 다독이는 듯한, 여린 변명의 애처로움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렇게 나는 오랜 시간 박노해의 삶의 굴곡을 전해 듣고, 또 그의 시를 읽어왔다. 이제 나는 그의 글들이 『노동의 새벽』에서 뿜어내던 막강한 힘을 세월 속으로 흘려보내며, 내면과 실존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거쳐 ‘지혜의 시’로 향해 갔다는 데 어느 정도 동의하기에 이르렀다.
오늘 나는, 예전에 써두었던 나의 옛글을 다시 꺼내 나의 새로운 생각을 덧붙여 마무리하려 한다. 그때, 그 글에는 내가 한참 내 길로 내달리던 시절, 저 두 편의 시 앞에 머물러 고민하고 다짐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옛글은 곧 나의 과거였고 일기였으며, 동시에 지금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전망이었다. 곧 ‘과거는 미래의 산물’인 것이다. 오래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되새겨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 나는 그의 옛글을 다시 생각하며 동일한 질문으로 나에게 묻는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가. 과연 이 시대는 사람에게서 희망을 볼 수 있는가.” 답은 세월과 함께 조금씩 달라졌지만, 끝내 하나의 문장으로 모아진다.
“인간의 희망은 인간 너머에서 온다.
또한, 오늘날 그 희망의 조건은 신을 철학하는 인간이다.”
이 명제는, 적어도 세 가지 근거로 더 분명해질 수 있다.
근거들
첫째 근거: “이상”은 언제나 선한가
박노해는 인간이 이상을 잃을 때 늙는다고 간파한다.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나는 덧붙여 묻는다. “인간의 ‘이상’은 언제나 인간에게 유익한가.” 사실, 무엇인가를 성취하는 ‘목적’만큼, 그것을 왜 원하며 어떻게 이루려 하는지의 ‘방향과 이유’가 계속 질문되어야 한다. 자본의 축적과 문명의 발달은 눈부신 성과를 가져왔으나, 동시에 0.1%로의 자본 집중, 사회 구성원의 고립 심화, 관계 단절 속 고독사의 증가 같은 비인간적 결과도 함께 낳았다. 이것은 “이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희망이 보증되지 않는다는 증거다. 이상이 인간을 살리는 방향으로 자라지 않으면, 이상은 곧 인간을 마모시키는 장치가 된다. 그러므로 희망은 “이상이 있다/없다”의 문제가 아니라, 이상이 어떤 윤리와 어떤 관계를 향해 있는가의 문제다. 희망의 조건은 ‘이상’ 그 자체가 아니라, 이상을 묻는 질문의 지속성—곧 방향의 정직함에 있다.
둘째 근거: 유한한 존재에게 희망을 전적으로 맡길 수 있는가
인간의 유한성은 역설적으로 인간 스스로 자기 한계 너머를 지향하게 만든다. 제한된 생애 주기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이 시대의 희망을 전적으로 맡긴다는 것은, 원리상 일시적이고 파편적일 수밖에 없다. 이 자각은 현대의 발명품이 아니다. 주전 8세기에서 4세기에 이르는 폭넓은 시대에 이미 인간의 유한함을 통찰했고, 그 유한함을 어떻게 살아낼지에 대한 지적 활동이 활발했다. 고대 히브리의 지혜서 코헬렛,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조망하며 삶의 개혁을 꿈꾸었던 예언자 이사야가 그 분명한 증거다. 결국, 질문은 이렇게 바뀐다. “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변하지 않는 희망을 어디에 붙들고 설 것인가.” 그러나 이 질문을 피하는 순간,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문장은 선언이 아니라 주문이 된다. 마음을 북돋우는 주문은 잠시 따뜻하지만, 구조를 견디게 하지는 못한다.
셋째 근거: 세상은 더는 인간의 독무대가 아니다
세상은 인간 중심으로 유지되는 때를 지났다. 모든 피조물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곧 희망이다. 코로나19 팬데믹과 기후 위기 속에서 드러난 여러 징후는, 인간 중심적 사고가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주었다. 삶을 핍절시키는 전염병의 발원이 인간의 삶의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 또한, “희망을 인간에게만 맡길 수 없다”는 현실적 경고다. 따라서 희망은 인간 단독의 성취가 아니라, 인간과 모든 피조물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질서에서 온다. 이는 인간이 피조세계의 총지배자가 아니라 자연의 한 조각임을 함의한다. 인간이 겸손하게 자신의 자리를 인식하고, 다른 생명체들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성을 배울 때에만 비로소 희망이라는 조각보에 한 조각을 수놓을 수 있다.
재질문. 박노해의 ‘사람’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앞서 살펴본, 박노해의 두 시에는 미처 살피지 못한 공통점이 있다. ‘사람’과 그 사람 안에 담긴 가능성을 찬사 하는 시인의 일관된 희망이다. 시인은 인간에 대해 두 가지 전제를 일정하게 유지한다.
(1)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희망의 출발점을 제공할 수 있다.
(2) 인간은 자기 자신을 희망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자기 혁명의 주체다.
시인의 전력이 노동운동이라는 고단한 삶의 자리였음을 감안하면, 이 전제는 충분히 인간적이다. 이것은 관념적 자아가 아니라 현실에 굳게 터한 인간상을 추구하려는 흔적이다. 땅의 문제들과 자기 몸으로 부딪히며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실존적 인간—그에게 희망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현실에서, 이 전제는 역설을 품는다. 시대는 노동을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흘렀고, 노동의 결과인 자본의 우산 아래 은신처를 만들었다. 노동자 내부에서도 엘리트 노동층이 자리 잡는다. 비보호 현장 노동자는 급증하지만 처우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돈의 대우가 아니라 인간다움의 정체, 아니 퇴보가 현저하다. 노동은 세분되고 노동력은 전문화되었지만, 노동자는 여전히 노동자일 뿐이다. 비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닐 뿐이다.
그래서 나는 박노해의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읽을 때마 반복되는 불편한 질문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가 말한 ‘사람’은 결국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희망은 누구에게서나 솟는 것이 아니라, 특정 조건을 갖춘 자에게만 허락된 말이 된다.
물론 “사람만이 희망이다”가 “어떤 사람만이 희망이다”로 축소되는 순간, 그 문장은 거대한 담론을 잃어버리고, 미미한 사유를 얻을 뿐이다. 여기서 나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견해를 경유해, ‘희망의 담지자’를 조금 더 세밀하고, 명료하게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블로흐가 말하듯, 희망의 사람은 단순히 현재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나은 가능한 삶”을 향해 나아가는 저항의 몸짓이다. 그는 현실의 억압적 조건과 두려움에 저항하며, 미래에 대한 의식을 통해 현재 자신의 삶의 자리를 더욱 굳건하게 다지려 한다. 그리하여 개인의 희망이 쌓여 사회에 축적되고, 그 변화의 끝에서 유토피아를 꿈꾼다. 결국, 희망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 자기 저항이기도 하다. 희망하는 사람은 바로 이런 자기 성찰의 존재인 것이다.
이 관점을 덧붙이면 박노해의 문장은 이렇게 정리된다. “사람만이 희망”이 아니라, ‘현실에서 이상을 살아내는 사람만이 희망’이다. 물론, 여기서 ‘이상’은 공중에 뜬 미래주의가 아니다. 다시 말해 이상주의자는 지독한 현실주의자이지, 비현실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좌절이라는 현실에서 좌절과 함께 자기 삶의 방향을 버텨내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미래를 경시하지 않는다. 그는 미래가 과거로부터 오고, 그 미래는 아직 미완성의 현재라는 것을 분명히 안다. 그런 점에서 그가 지극한 현재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고친다.
“현재를 자기 이상으로 살아내며,
타자를 그 이상으로 용기 있게 안내하는 사람만이 희망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의 한 형식을 어쩌면—‘詩人’ 일지 모른다. 특히 철학을 시로 표현할 줄 아는 자, 철학-시인이야말로 희망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희망의 인간으로서 철학시인: 새로운 노동자, 희망을 ‘끊임없이 발굴’하는 존재
철학 시인은 새로운 지혜노동자다. 그는 매 순간 자기 현실에서 이상을 찾아내려 수고한다. 가장 땅바닥에 가까운 이야기에서 이데아를 길어 올리기 때문이다. 그는 멀리 보려면 먼저 발아래를 뒤져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가장 낮은 자리에 먼저 서고, 가장 작은 장면을 오래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길어 올린다. 관찰은 잡기가 아니라 해석이 되고, 해석은 비판이 되고, 비판은 다시 삶의 방향을 묻는 문장이 된다. 글로써 자신을 성찰하고 시대를 조망한다. 따라서 철학 시인은 자기 글을 사유의 틀에 넣어 세계에 내보내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글 앞에서 사람들은 의심에 찬 눈으로 묻는다.
“앉아서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그렇다 해도 그는 분명하게 답한다.
“나의 마당을 쓸면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집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희망은 ‘다가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찾아내 붙들어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희망은 막연한 미래의 기대가 아니라, 현재의 현실이다. 희망은 멀리서 배달되는 소식이 아니라, 눈앞의 먼지 속에서 손으로 건져 올리는 사건이다. 그러니 희망은 기다림의 결과가 아니라, 견딤의 과정 속에서 모습을 얻는다.
한편 철학과 시가 만나는 자리에서는, 언제나 하나의 태도가 먼저 일어난다. 나는 그것을 ‘속도를 낮추는 일’이라 부른다. 희망이 가장 위험해지는 순간은, 희망이 너무 빨리 도착해 타인의 밤을 지워버릴 때다. 말이 먼저 결론을 내리고, 위로가 먼저 도착하며, 어둠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도 “괜찮아질 것”이라는 문장이 고통을 덮어버리는 때가 있다. 그래서 철학시인은 서둘러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위로의 속도가 타인의 밤을 앞지르지 않게, 먼저 멈춰 서서 어둠을 견딘다. 그 멈춤—검은 안식—위에서만, 한 걸음은 비로소 방향이 된다.
나의 확신은 길을 걷는 시인만이 박노해가 노래한 “사람만이 희망이다”를 구체적인 사건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걷기’는 성급한 행진이 아니다. 그것은 멈춤을 품은 걸음, 어둠을 지우지 않기 위해 속도를 조절하는 걸음이다. 희망은 신기루가 아니다. 다만 아무 때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을 지우지 않는 속도로, 어둠을 견디는 자 앞에서만—희망은 ‘현실’이 된다. 그 길을 떠나는 사람, 그가 가는 방향 어딘가에서 희망은 살아난다. 그리고 그 살아남은 희망은, 누군가의 밤을 단숨에 밝히는 조명이라기보다, 밤을 지나갈 수 있게 하는 작은 등불에 가깝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나의 질문은 다시 이어진다. 그가 말한 ‘결코 변해서는 안 될 것’은 대체 무엇인가. 박노해는 “변하지 않는 사람”을 말하면서도, 정작 그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시 너머로 남겨둔 것 같다. 하여 나는 그가 비유한 “늘 푸른 소나무”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 상록수의 이미지는 그저 ‘변하지 말라’라는 의지의 강조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핵심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따라서 나는 박노해의 언어가 닿지 못한 그 구체적인 ‘희망의 닻’을, 더 먼 고대 히브리 전통에서 끌어오려 한다. 희망이 단지 사람의 결심에만 매여 흔들리지 않도록, 사람을 넘어서는 기준의 자리에서 다시 붙들어 세우기 위해서다.
<느비임> 이사야 40장 6-8절: 변하는 인간, 변하지 않는 로고스(Logos)
나는 이제 ‘사람’을 다시 묻되, 그 사람을 ‘신을 사유하는 자리’에서 다시 묻고 싶다. 나는 고대 히브리 문학의 정수인 <느비임>의 한 구절을 읽는다. 그 구절은 심판과 멸망에 직면한 고대 이스라엘에게 ‘제2의 엑소더스’를 현실로 상상하게 만들어준다. 곧 ‘다시 살아남’을 길에 은유하여 일러준다. 과거 출애굽의 기억과 창조의 언어가 현재 그들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서 엮였다. 이스라엘 문학의 토대인 그들의 신학 역사에서 창조가 신학화되는 중요한 순간이다. 여기서 핵심은 분명하다. 이 땅의 주도권이 신이 창조한 인간에게 있지 않다는 자각이다. 피조물인 인간은 그 스스로 자기 무대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저 역사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는 미물이라는 고백이다. 풀처럼 스러질 존재라는 자기 성찰이다. 신앙을 가진 자는 결국 자신이 들판의 풀과 같다는 자의식을 가진 자이다. 그 자의식을 압축하여 이사야는 이런 시(詩)를 남겼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의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다.
(…)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이사야 40:6-8 발췌>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바로 피조물인 인간과 대조되는 것이 창조의 신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말씀(His Logos)’이다. 그 로고스는 인간이라는 텍스트 밖에서 인간에게로 들어온 것이다. 따라서 인간과 로고스의 대조는 ‘사람’의 위상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모든 인간은 ‘마르고 시들 수밖에 없다.’ 반면에 ‘로고스’는 마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만약,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선언이 성립하려면, ‘로고스’를 장착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여기서 박노해가 말하는 ‘인간만이 희망이다’라는 주장은 재배열이 불가피해진다. 인간의 의지는 수시로 변한다. 하지만, 박노해의 시는 그 인간의 가치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릴 단서를 제공한다. 바로 변화의 빠름과 크기만큼 치열한 자기 변화를 이루어내어 “결코 변해서는 안 될 것”을 지켜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이사야의 견해를 빌리면, 그 변하지 않는 것은 구체적으로 ‘로고스’다. 나는 이렇게 정리한다. 로고스에 자신을 맡긴 사람만이 희망이다. 그리고 이 거대 담론을 미시적으로 삶에 끌어들이는 한 형식이, 바로 철학 시인(이다.
인간독자주의를 넘어 공존의 공동체성으로
이제 나는 앞서 말하는 세 번째 근거로 다시 돌아가 보려 한다. 철학 시인이라는 희망으로서 인간은 개인을 넘어 공존의 질서를 지향한다. “철학”은 인간을 인간중심주의에서 끌어내어, 피조 세계의 공동체성 속으로 다시 위치시키려는 사유의 분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희망은 구호가 아니라 구조가 된다. 사람은 자신이 약하다고 고백할 때 비로소 로고스, 현실에 기반한 철학의 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 로고스는 자기 허용, 비움(kenosis)이 핵심이다. 결국, 이 로고스에 따르면, 인간이 스스로 자기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깃들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문장은 최종적으로 이렇게 재배열될 수 있다.
사람이 희망이 되려면, 먼저 사람이 자기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사람이 희망이 되려면,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것에 의해 붙들려야 한다.
사람이 희망이 되려면, 사람이 인간만의 무대를 내려놓고 피조세계의 공존으로 돌아서야 한다.
이때, ’ 철학 시인이 희망이다 ‘라는 명제는 희망이 인간의 의지로 꾸며낸 장식이 아니라—인간의 사유와 그 너머에서 인간의 세계로 ’ 입장‘하여 인간을 다시 인간답게 세우는 생존의 조건이 된다.
결론: 로고스를 품은 철학 시인
책과 시를 다시 읽고 글을 쓴다는 것은, 우리가 어디쯤 와 있는지 되묻는 일이며, 동시에 어디로 가는지를 조망하는 대답이다. 오래전 박노해의 이 책은 절판되었고 한 번 재출간되었다. 그 사이에 그의 삶은 자기 말처럼 언제나 현실 속에서 온전히 드러난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문장에 여전히 공감한다. 그리고 그 문장이 사라지지 않는 꽃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도 여전하다. 하여 기회 될 때마다 다시 나의 현실에서 낯설게 읽으며, ‘재해석’한다. 그리고 2025년 나는 감히 이렇게 한 매듭을 남긴다. ‘인간만이 희망이다’, 다시 말해, ‘신을 철학하는 사람이 희망이다.’, “로고스를 가진 철학 시인이 지금-여기에서 희망이다.” 인간의 희망은 자고 하는 인간 너머에서 온다. 자신을 이 피조 세계의 한 부분처럼 받아들이고, 인간 너머에서 오는 것에 자기를 맡기면서 인간을 겸손과 공존으로 다시 세우는 용기를 굳게 하는 것이다.
희망은 인간에게서 오지 않는다.
희망은 로고스에 붙들린 인간이 지금-여기에서 발굴해 내는 철학의 열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