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종이의 감촉 Jul 10. 2020

엄마라는 이름 속을 누비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모든 일이 일어난 그 시간이 마치는 날.

내가 지금껏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덜렁대는 사람. 태어난 지 34개월에 접어드는 둘째 딸. 둘째 아이는 방바닥에 무언가 놓여있으면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고, 밟거나 차고 혹은 걸려 넘어진다. 아장아장 걷던 시절, 아이가 무심코 던진 우유병에 내 앞니가 맞아 치과에 달려간 적도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피해사례가 속출하는데, 마구 휘두르는 손가락에 눈이나 콧구멍이 깊숙이 찔린다거나 뒷발길질에 명치가 채이고 엄마의 새 안경이 벌써 세 번째 부러지는 일은 이제 그러려니 하는 일상.


첫째는 극적인 대척점. 아주 어릴 적부터 바닥의 물건을 밟은 적도 넘어 다닌 적도 없고, 아주 조심스럽게 피해서 지나간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간다는 옛말을 뱃속에서부터 간직한 아이로, 그런 첫째에 익숙해진 엄마는 둘째가 신기하고 귀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무척 버겁기도 했다. 걱정도 많고 조심스러운 첫째를 어르고 달래고 있다가도 위험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둘째에게 달려가 주의를 주는 양극단을 오가며 초를 다투는 일상 속에서 나는 쪼그라져버렸다.


극단적인 성향의 두 아이가 감당이 되지 않는 날은 소리 지르는 것을 참지 못했고, 아이들은 많이 울었다. 첫째 아이는 스트레스에 밤마다 이갈이가 심해졌고, 둘째는 어린이집에서 놀다가도 무심코 혼자 울음이 터져 선생님이 안아주어도 잘 달래지지 않는다. 활달한 아이를 격려하기보다 제지하느라 허덕이는 일상 속에서 나는 점점 지쳐갔고 한 달 넘게 고열과 관절통을 반복하다 루푸스라는 자가면역질환이자 희귀성 난치병 진단을 받아들었다.


첫 아이 백일 무렵을 기억한다. 질펀하게 싼 똥을 닦아내다 무심코 거울을 보았을 때, 그 속에는 땀과 짜증이 뒤섞인 엄마의 얼굴이 있었다. 일그러진 엄마 얼굴을 벌쭉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 아이 얼굴도 동시에 보고 말았고, 그렇게 어미의 사랑보다 절대적인, 아이의 사랑을 목격했다. 둘째를 낳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젖먹이 아이를 안고 테헤란로 높은 빌딩의 지하주차장에서 가슴을 열어 수유한 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올라가 본 면접. 그렇게 나는 꿈에 그리던 회사에 합격했으나 주변에서 아이를 돌봐줄 여건이 되지 않았고, 울음을 삼키며 하고 싶었던 일 대신, 죽도록 하기 싫었던 일, 출근할 수 없다는 연락을 돌렸다.


오늘도 저울질은 계속 된다. 세상을 다 주어도 바꾸지 않을 소중한 아이들의 맑은 웃음 그리고 놓쳐버렸고 이제 기나긴 과정을 되짚어 찾아야 할 나의 건강. 우주를 통틀어 이렇게 나를 사랑해줄 존재가 있을까 싶은 엄마를 향한 아이들의 특별한 사랑. 당당한 커리어와 쪼그라드는 엄마라는 일상. 내가 잃은 것과 내가 얻은 것. 아무리 세어보아도 쉬이 알 수 없다.

이제 그저 엄마라는 역할 앞에 무력함을 인정한다. 아이들을 다그치는 것도, 제 각각인 아이 둘의 기질을 이해하겠다며 밤을 맞으며 육아서적에 코를 박는 일도 그만. 어떤 날은 밥도 간식마냥 대강대강 챙겨먹고 그저 냉장고 앞 조그만 공간에 옹기종기 셋이 모여 앉아 기대어 놀고 쉬고 웃는다. 어떤 날은 아파트 단지에 ‘우리만의 시크릿 가든’으로 이름한 작은 정원 앞에서 작은 돌을 던지고 또 던지고 그저 던지기만 해도 재미지다. 개미를 주의 깊게 관찰하는 아이들의 등을 바라보면 미소가 흐른다. 우리의 일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모든 일이 일어나는 시간들이다.


얼마 전 놀이터에서 바스락거리는 날개를 뉘이고 스러져가는 나비를 발견했다. 그 나비를 첫째 아이 조약 손에 조심스럽게 담아 묻어주고 작은 돌과 흐드러진 작은 꽃을 모아 놓아주며 이 세상에서 나비의 추억이 무엇일지 얘기해보고 나비노래를 불러주었다. 가냘픈 날개로 하늘을 누리던 나비의 대담함을 생각하며 나도 위로를 받았다.


나약한 마음과 몸으로 엄마라는 이름 속을 누비고 있는 오늘. 우리만의 장례식을 치러준 나비를 오늘 찾아가고 내일 그리고 다음날 찾아가다 그렇게 나비를 잊은 것처럼, 나의 초라한 날갯짓이 마치는 날, 엄마의 이야기가 잊혀지는 그 날을 생각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모든 일이 일어난 그 시간이 마치는 날.

이전 10화 코끼리 같던 내가 생쥐보다 더 작아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