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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카리 Jan 18. 2023

우리 커피 한잔 할까요?

직장 생활의 오아시스

오늘 하루 이 글을 읽기 까지 나는 얼마나 많은 의식적인 일을 했을까? 생각보다 내가 무엇을 해야지라고 의식한 일 보다 그저 무의식이 시킨대로 한 일들이 많다.


일어나서 혹은 알람에 눈이 떠져서 비몽사몽 씻고 아침을 먹는둥 마는둥 옷을 왜 이걸 골랐지? 신발은 늘 신던 아니면 오늘은 바꿔서? 그리고 나올때 문 손잡이를 돌렸나? 열린 문을 밀고 나왔나?지하철을 탈때 몇 번째 칸에서 탔나? 늘 타던 그곳? 아니면 줄이 길어서 사람이 너무 많아서 떠밀려서 그냥 탄 그곳? 늘 보던 핸드폰 속 화면을 보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그렇게 자리에 앉았다가 커피를 한잔 하자고 누군가가 말을 걸면 잠깐 의식이 깨어난다. 하던 일을 정리하고 혹은 일이 있던 없던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그리고 오늘들어 가장 적극적인 고민인 '뭘 마실까?' 에 대한 고민을 한다. 음료를 손에 들고 편안한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한다. 


일 얘기 신변잡기 어제 본 드라마 얘기, 스포츠 얘기 게임 얘기 다양한 얘기들이 오고 간다.


어떤 조사에 따르면 이런 캐쥬얼한 대화에서 나오는 정보들이 딱딱한 업무 브리핑보다 더 많은 회사와 일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고 한다. 이야기들은 많은 정보를 싣고 어떤 목적성을 지니지 않고 흘러 나와서 흘러간다. 


그런데도 편안한 커피 타임에 우리가 한 얘기는 과연 내가 의도하고 한 얘기들일까? 아니면 그저 모두의 생각이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고 흡수해서 떠다니는 빙산 같은 것일까?


오늘 내가 집에서 회사 까지 오면서 열고 지나온 문이 몇개 인지 그 문을 열때 당겻는지 밀었는지 자동 문이었는지 미닫인지 여닫인지를 모르고 지나 온것처럼 방금 나눈 대화의 주제도 그렇게 흘러갔다가 사라진다.  




언뜻 보면 아무 의미도 없이 낭비한 시간이고 누군가에게는 하고 싶은 말도 없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맘 맞는 친구 또는 편안한 동료와의 대화 시간은 큰 즐거움이고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오면 우리는 친해졌다는 느낌과 함께라는 생각을 느낀다.


아마존 오지의 원주민들은 산넘고 험준한 정글을 헤치고 정기적으로 다른 부족을 찾아간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단순히 그간 못나눈 얘기를 나누기 위해서 라고 한다. 


현대인도 그렇다. 술모임, 동창회, 저녁 식사, 점심식사, 차한잔, 엄격한 회사의 미팅도 모두 이야기를 나누고자 모인다. 대화의 주제가 정해져 있기도 하고 정해져 있지 않기도 하지만 우리는 모여서 이야기를 나눈다. 


주제가 있는 딱딱한 자리에서 사적인 정보와 농담으로 자리를 열면 자리가 부드러워진다. 프레젠테이션 스킬에서도 아이스브레이킹은 아주 중요한 과정이다. 정보를 취합하는 회의에서도 이렇게 서로 관련 없는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더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을 느낀다. 왜 일까?




언어에 대해 공부를 할때 언어는 인간만이 지닌 가장 복잡한 커뮤니케이션 기술이라고 배웟다. 또 이 언어를 기록하면서 인간은 정보를 만들어내고 기억하고 후대에 물려준다고 했다. 하지만 오늘 나눈 내 대화는 정말 정제된 회의석상의 발언과 보고서에 옮긴 글들을 빼면 대부분 의도를 가지지 않고 누군가와의 상호 작용에서 나왔다가 들어간 내용들이다. 


심지어 보고서의 방향성 또한 내가 그간 나눈 대화들의 총 영향력의 결과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길을 걷다가 커다란 나무나 풀숲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지지배배 짹짹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도대체 무슨 할 말들이 그렇게 많을까 생각을 한적이 있다. 


오늘 6명이서 원을 만들고 또 그렇게 크고작은 원들이 모인 카페에서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다. 과연 저 대화들 중에 내가 의식을 하고 목적과 방향성을 가지고 하는 대화는 몇이나 될까? 공공장소의 웅성거림으로 묻혀버린 이야기 들은 어떤 이야기 들이었을까?



자동차를 운전 하거나 자전거를 탈때, 아니면 그저 걸을 때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매우 고급 기술들의 최 정점에 서있는 판단과 결단을 한다. 


가속 페달을 밟을때 우리는 연료와 추진 장치의 연관성을 계산해야 하고 핸들을 돌리며 조향장치와 핸들 사이의 조합에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면서 같은 과정을 하고 있는 다른 차들과의 거리를 염두해 둬야 한다. 그리고 도로의 온갖 표지판들을 보고 그 뜻을 해석해서 속도를 줄이고 차를 멈춘다.

....

그리고 네비게이션의 지시를 따른다. 

...

그리고 음악을 들으며 따라서 흥얼거린다. 

....

그리고 핸드폰 메시지에 답한다.

...

이런 복잡한 프로세스를 우리는 그냥 한다. 어떤 섬세한 조절이 아니라 그냥 멍하니 때론 음악에 춤을 추며 한다. 하지만 이것을 AI로 지시할 경우 얼마나 많은 논리적 판단이 프로그램 되어야 하며 얼마나 많은 기계장치들의 협력을 이끌어 내야 할까?



우리는 저렇게 섬세한 일들도 그냥 의식하지 않고 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나누는 대화들 또한 그냥 커피 한잔을 마시며 하는 흰소리라도 그저 하는 얘기가 아니다.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유레카를 외치고

뉴턴이 사과를 보다가 중력을 발견했다. 

음악가들이 흥얼거리다 흘러나온 멜로디를 잡아 냈었다.


그때 의도를 가지고 그것을 떠올리려고 했을까? 실험의 과정이었을가? 아니다. 실험 와중에 혹은 고민 와중에 잠깐 무의식과 교감하는 시간이었다. 


정치권에서 민심의 향방을 정하는 가장 민감한 순간은 얼마 전까지 식구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는 명절 밥상이었다. 밥상에서 나누는 얘기들에 정국이 많이 요동치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커피살롱을 금지 시킨적이 있다. 거기서 자유와 인권에 관한 정치 사상들이 태어나고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인터넷 상의 의견들을 지배하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한다. 심지어 우리는 인터넷에 무엇인가를 업로드 하기 위해 행동을 한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런 떠도는 말들을 흡수하고 그중에 몇몇을 남겨둔다. 오늘도 나는 대화를 나누면서 또 어떤 단어들이 머리속을 떠돌았는지 또 남았는지 카페인이 증폭시킨 이 말들의 흐름을 부유하며 걷어낸 뜰채를 곰곰히 살펴 본다. 


이제 다시 업무 책상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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